“인구 절벽, ‘천만 영화’가 사라진다” K-콘텐츠의 미래는[ESF 2023]

by이다원 기자
2023.06.16 05:00:00

①영화감독 윤제균 인터뷰
가족 소중함 알기에…가족愛 담아 ‘쌍천만’
결혼·가족관 급변하는 시대 체감하기에
콘텐츠 업계 위기감↑…글로벌 시장 기회로
新가족상 포용한 K-콘텐츠로 공감대 만들자

[이데일리 이다원 기자] 한국 최초로 ‘쌍천만’을 기록한 영화감독이 있다. 2000만명이 넘는 관객을 웃기고 울린 윤제균 감독의 두 영화는 모두 가족의 사랑과 믿음을 그리고 있다. 그런 그가 “다시는 한국에서 ‘천만 영화’가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구 절벽을 마주한 우리나라의 콘텐츠 산업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우려다.

제14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연사로 나서는 윤제균 감독이 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윤제균 감독은 15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말하며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인구 감소에 따른 위기를 기회로 바꾸기 위한 길을 창작자들이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가족 형태를 포용하는 동시에 독창적인 콘텐츠로 세계 시장을 공략하자는 것이다.

윤 감독은 가족애를 중심으로 다룬 영화 두 편이 각각 1000만명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 감독이 됐다. 영화 ‘국제시장’에서는 한국전쟁 이후 격동하던 우리나라 격변기를 헤쳐온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해운대’에서도 가족의 소중함을 드러낸 장면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줬다.

가족애를 다룬 영화를 다수 제작하게 된 배경이 있다. 윤 감독은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따뜻함과 위안을 굉장히 많이 느끼며 자랐다”며 “그래서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혼해 가족을 꾸리고 두 아들을 키우면서는 그가 받은 사랑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따뜻하고 화목한 가족을 이뤘다고 자신하는 그는 지금도 아들들과 자주 대화를 나눈다.

그러면서 윤 감독은 자녀 세대에게 결혼해 가족을 꾸릴 것을 강요할 수 없는 시대가 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는 “젊은 친구들에게 결혼에 대해 물으면 ‘이거 꼭 해야 하나요’라는 답이 돌아온다”며 “젊은 세대에게 결혼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아이들 세대에게 모든 의사 판단의 기준을 개인의 행복에 두라고 한다”며 “행복하다는 판단이 서면 결혼을 선택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되물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족관도 변화하고 있다. 윤 감독은 “우리 (세대)가 참 격동의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싶다”며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인식하게 됐다고 말했다. 1969년생 베이비붐 세대인 그는 한 반에 60~70명이 모여 ‘산아 제한’을 주제로 포스터를 그리던 국민학교 시절을 보냈다. 이어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캠페인이 펼쳐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를 만들다 보니 어느새 저출산 대책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을 기록하는 나라가 됐다.

그의 통찰에 따르면 산업화 세대를 거쳐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우리 사회의 화두는 ‘국가’였다. 나라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그러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는 민주화 운동 등을 통해 ‘시민’이 주체로 등장했다. 이어 2000년대 중반부터는 ‘개인’이 사회의 중심이 됐다. 그렇기에 가족 역시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하고 자녀를 낳아 꾸린 3~4인 가족에서 1~2인 가족으로 범위가 넓어졌다.

이런 변화를 이해하기에 그는 인구 절벽에 대한 위기감도 느끼고 있다. 윤 감독은 “인구 감소가 가족 개념의 변화를 넘어 길게는 생존 문제와도 연결되는 듯하다”며 “학령인구 감소부터 경제·산업 등 인적 자원이 풍부하던 과거와 다른 세계가 오고 있다”고 봤다.

제14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연사로 나서는 윤제균 감독이 이데일리와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이영훈 기자)
창작자로서 한국 콘텐츠 업계에 대한 고민도 크다. 윤 감독은 “제가 ‘천만 관객 영화감독’을 두 번 했다. 5000만 인구 중에 두 번의 기회가 있었다”며 “하지만 인구가 계속 줄어들면 앞으로 영원히 우리나라에서 1000만 관객을 동원할 영화는 나오지 못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관객 수가 줄어드니, 영화가 흥행할 가능성도 점차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현상적 내수 시장이 쪼그라들면 내수 작품들도 그 규모에 맞게 제작비를 줄일 수밖에 없다”며 “그러다 보면 당연히 깊이가 낮아지고, 퀄리티도 떨어지면서 서서히 (한국 영화계가) 몰락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영화 제작 현장에서도 젊은 인구가 줄어드는 것을 체감할 때가 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해 카메라·조명 장비의 소형화로 영화 촬영에 필요한 스태프 수가 감소하기도 했지만, 젊은 인구가 줄면서 현장에 투입되는 청년 인력 역시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대를 역행할 수는 없다. 그는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미 출산율은 꺾였다”며 “정치인, 사업가뿐만 아니라 콘텐츠 제작자들도 이런 고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구 감소로 닥친 위기를 기회로 바꿀 방법은 바로 세계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K-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높아진 만큼 한국 영화·드라마의 해외 수출도 활발해지고 있다. 글로벌 온라인동영상플랫폼(OTT) 등을 통해 글로벌 관객과 만날 기회도 늘었다.

윤 감독은 “영화계로서는 위기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기회가 열렸다”고 분석했다. 그는 “드라마 ‘오징어게임’ 이후로 한국 배우들이 우리나라 말로 만든 콘텐츠여도 잘 만들면 세계 시장에서 주목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이건 엄청난 발전”이라고 짚었다.

보편성과 독창성을 아우른 ‘웰메이드’ 콘텐츠라면 전 세계에서 환영받을 수 있는 시대가 됐다. 특히 윤 감독은 “우리나라 콘텐츠의 특징 중 하나라면 가족, 혈연에 대한 진하고 끈끈한 감정이 있는 것”이라며 “이런 점이 가족을 중시하는 동남아시아나 중동, 중남미 등에서 주목받는 이유인 듯하다”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가족에 대한 개념이 자유로운 서구 사회에서도 한국 콘텐츠의 이런 점을 주목한다.

수많은 국내 감독들, 제작자들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통용할 수 있는 작품들을 구상하고 있다. 윤 감독 역시 창작자로서 이런 고민을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해 CJ ENM 스튜디오스 대표로 부임해 콘텐츠 부문을 맡은 그는 기회를 잡으려면 다가올 시대에 대한 예측과 고민이 필요하다고 본다.

특히 윤 감독은 인구 감소에 따라 새로 등장한 사회상과 가족을 포용한 콘텐츠가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는 “기존의 가족 형태와 다른 가족의 모습이 앞으로 계속 나오지 않을까 생각한다”며 “크리에이티브한 콘텐츠는 전 방향으로 열려 있다. 가족에 대한 획기적 관점을 담은 이야기는 앞으로 계속 등장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윤 감독이 꼽은 대표적 작품은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어느 가족’이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가족이 된 이들을 주인공으로 일본의 사회상을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지난 2018년 프랑스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인 황금종려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처럼 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서로 의지하며 같은 공간에 살아가는 새로운 형태의 가족이 (한국에서도) 나오고 있다”고 했다. 어쩌면 이를 통해 우리 사회가 변화를 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한 윤 감독은 점차 증가하고 있는 1인 가구, 이민자에 대한 시각도 변화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앞으로 1인 가구가 늘면서 소형 주택이 늘어나는 등 산업적 파급효과가 일어날 것”이라며 “그들에 대한 이야기와 영화가 앞으로 많이 나오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이야기도 늘어날 수 있다. 이미 외국인 이민자가 증가세에 접어든 만큼 다양한 문화를 포용해야 할 필요성도 커지고 있다. 윤 감독은 “제가 ‘국제시장’에서 다뤘듯이 우리나라도 파독 광부, 간호사 등 이민의 역사와 핍박의 세월이 있었다”며 “이제는 우리가 이민자, 외국인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커진 만큼 이들에 대한 시선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고 말했다.

바뀐 사회와 변화한 가족상을 반영한 한국의 영화·드라마가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 윤 감독은 오는 21~22일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열리는 제14회 이데일리 전략포럼 ‘인구절벽 넘어, 지속가능한 미래로’에 연사로 참석해 K-콘텐츠 속 변화하는 가족상과 산업의 미래에 대해 논한다.

“뻔하고 반복적인 것보다는 새로운 분야를 찾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윤 감독 역시 창작자로서의 도전을 이어가고자 한다. 그는 “시대의 흐름이 바뀐 만큼 일, 사랑, 가정에서 어떻게 최선을 다할지를 고민해야 한다”며 “내게 동기부여가 되고 자극이 될 분야를 찾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