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 더 기승 부리는 '좀비기업 연명책'…컨트롤타워부터 정비해야(종합)
by송길호 기자
2018.02.15 05:35:00
[정치논리에 갇힌 구조조정]
금리 상승기 선제적 구조조정 절실
文정부 소득주도성장에 밀려 정체
정치권선 지방선거 전 '연명책'남발
오락가락 정책에 기본원칙 사라져
"산업부→기재부 컨트롤타워 정비…
금융· 산업논리 균형있게 반영해야"
[이데일리 송길호 금융전문기자] “모든 것이 정체됐다” 최근 사석에서 만난 전직 고위 관료는 문재인정부의 기업 구조조정을 이렇게 평가했다. 구조조정에 대한 의지도 성과도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는 “문재인정부 들어 구조조정이란 화두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렸다”며 “소득주도성장이라는 이름아래 진행되는 각종 반(反)구조조정정책들이 난무하면서 경제생태계의 부실이 심화되고 있다”고 꼬집었다.
정치논리에 휘둘린 정책의 역주행, 그에 따른 국민혈세의 비효율적 배분, 채권 금융기관들의 부실한 관리….
기업 구조조정이 미로속을 헤매고 있다. 기득권 철폐, 손실분담 등 구조조정의 기본원칙은 사라지고 지원, 연명, 보호라는 정치적 구호만 횡행한채 구조조정의 정치화(政治化)가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조선 건설 등 주력업종은 물론 경제 전반의 활력이 떨어지면서 기업 생태계는 부실의 늪에 허덕이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단기 미봉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인은 더 커질 것”이라며 “금리상승기 선제적 구조조정이 절실한 상황에서 정치논리에 따라 구조조정이 지연될 경우 경제의 역동성 회복은 요원하다”고 경고한다.
| 백운규(오른쪽)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해 말 경남 통영시 성동조선해양을 방문, 텅빈 시설물을 둘러보고 있다. 2조원이 넘는 공적자금을 받은 성동조선은 업황 부진과 구조조정 지연으로 청산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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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 서울 여의도 수출입은행 본점 앞.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파속에서도 노조의 천막농성이 한창이다. 지난해말부터 회사의 회생대책을 요구하며 실력행사에 나선 성동조선해양 노조원 10여명은 요즘 그 투쟁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금명간 공개될 외부컨설팅 결과를 앞두고 정부와 수출입은행을 압박하기 위한 포석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성동조선해양과 지난해 법정관리를 졸업한 STX조선해양 등 중견 조선사들은 이미 빈사상태다. 지난해 11월 한 회계법인 실사 결과 두 회사의 청산가치는 존속가치보다 3배 이상 높게 나왔다. 국민혈세로 투입된 공적자금만 7조원(STX조선 4조5000억원, 성동조선 2조6000억원)이 넘는 상태. 조선업 불황의 파고속에서도 지지부진한 구조조정의 결과다.
그러나 두 회사는 다시 회생이 유력해졌다. 이달중 나올 다른 회계법인 실사 보고서에선 두 회사의 회생을 위한 ‘맞춤형’컨설팅 결과가 나올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두 회사의 연명을 전제로 대책을 마련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두 회사가 청산의 위기에서 회생으로 극적 반전을 이룬 계기는 지난 1월 3일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 이후다. 당시 문 대통령은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의 옥포조선소를 방문, “조선 경기가 곧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며 “(조선업이) 재도약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배석한 최종구 금융위원장에겐 “금융이 빠지면 일이 안 된다”는 뼈 있는 농담도 했다. 금융권 지원을 통한 기업 회생이라는 구조조정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셈이다. 정치논리가 경제논리를 압도한 이날 조선업 구조조정의 기본 방향이 명확해졌다. 한 은행 임원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인력감축도 사업부 매각도 모두 물건너갔다”며 “대우조선 뿐 아니라 STX조선, 성동조선 등 중견 조선사들이 연명의 기회를 잡았다”고 말했다.
| 전국금속노동조합이 지난달 24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구조조정 저지를 위한 집회를 마친 후 청와대를 향해 행진하고 있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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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일련의 과정은 구조조정의 정치화를 투영한다. 오재인 단국대 경영대 교수는 “정부는 한계기업 정리가 불러올 사회적 파장을 회피하는데 급급한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치 논리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주주, 채권단은 물론 노조, 하청업체, 지역 자영업자 등 이해관계자들의 산적한 이익을 조정하는 일은 고도의 정치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의 정치화 현상이 현 정부들어 더욱 심화됐다는 점이다. 최공필 한국금융연구원 미래전략센터장은 “(최저임금인상, 근로시간단축,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등) 소득주도성장의 이름으로 진행되는 각종 정책들은 일자리 늘리기가 지상과제”라며 “당연히 인력감축을 수반할 수 밖에 없는 기업 구조조정은 환영받기 어렵다”고 말했다.
특히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논리는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정부가 대우조선은 물론 회생이 불투명한 중견 조선사들에까지 금융지원을 통한 연명책을 택한 것도 결국 이들 조선사들이 집결해 있는 PK지역의 민심을 의식한 결과라는 분석이 나온다.
산업계 일각에서조차 이 같은 정책방향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한다. 중국 등 후발국과의 치열한 경쟁에 직면해 있는 조선업계 현실에서 자칫 업계 전체의 경쟁력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얘기다. 금융계 관계자는 “천수답처럼 조선업 시황이 개선되기만을 기다린채 계속 지원에 나서겠다는 건 밑빠진 독에 혈세 퍼붓는 꼴”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기업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하면 결국 경제생태계는 뿌리부터 곪게 된다. 생산적인 부문으로 흘러들어가야 할 자원이 한계기업, 이른바 좀비기업과 같은 비생산적인 부문에 잠기게 되면 산업 구조의 혁신을 저해하고 경제 전체의 후생과 효율, 생산성을 떨어트리기 때문이다.
최근 대우건설 매각 실패의 원인이 됐던 잠재부실 문제도 사실은 산업은행 주도의 구조조정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가 국책은행 중심의 구조조정 방침을 정한 이후 경쟁력을 상실한 기업 대부분이 산업은행에 들어가 있는 상태. 지난해말 현재 108개사로 이들 기업들의 부실위험노출액만 6조7223억원에 달한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대우건설 금호타이어 뿐 아니라 산업은행 산하 기업들은 대부분 부실화돼 있다”며 “부실을 털어내고 구조조정에 나서야 하지만 산은은 그 부실을 드러내지 않고 정리할 의사도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향후 금리 인상이 예고되면서 구조조정 대상 한계기업들의 부실화는 더욱 깊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행이 지난해말 분기사업보고서를 제출하는 2100여개 기업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평균 대출금리가 1%포인트 올라가면 연간 이자부담액은 14.2%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은 관계자는 “(전체 기업의 15%에 달하는) 한계기업들은 신용등급이 낮아 일반 기업들보다 대출이자부담이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하면 향후 시장금리상승 압력으로 채무상환부담은 더욱 가중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현상은 구조조정을 미루고 단기 대응책에 급급했던 1990년대의 일본 경제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당시 일본은 자산가격의 버블 붕괴에 따른 구조적 문제점을 경기순환기의 일시적인 후퇴로 오판하고 단기적인 경기부양에 집착했다. 그 결과 시한폭탄이나 다를 바 없는 좀비기업들이 급증하면서 경제의 생산성과 역동성은 뚝 떨어지고 결국 ‘잃어버린 20년’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신용지원이 없으면 파산하게 될 한계기업 비중은 1990년대말 일본 수준인 14%를 넘어 이미 임계치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재인정부의 구조조정 전략은 반쪽짜리다. 일단 재무적 관점 보다는 산업정책적 측면을 더욱 고려하겠다고 공언한다. 2016년말 한진해운 청산 과정에서 금융논리에 집착해 물류생태계가 와해되는 등 산업경쟁력 측면에서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다는 비판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다.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를 금융위원회에서 산업통상자원부로 바꾼 건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논리는 오히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박근혜정부시절 금융위원회 주도의 구조조정이 금융논리, 재무적 관점에 경도됐듯 산업통상자원부의 구조조정은 일자리 유지, 자금지원 등 기업의 회생과 연명에 기울고 있다는 얘기다. 이병태 KAIST 경영대 교수는 “산업적 측면을 고려한다는 건 노조 등 이해관계자나 표심에 어두운 정치인들에게 구조조정에 저항할 명분만 제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치논리가 횡행한 현실속에서도 기업 구조조정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선 결국 금융논리와 산업논리를 균형있게 반영한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위해 구조조정의 컨트롤타워를 산업부에서 경제정책 전체를 총괄하는 기획재정부로 옮겨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공학과 교수는 “금융논리와 산업논리의 통합적 접근을 위해선 상위 부처인 기재부 주도로 구조조정의 원칙과 방향을 정해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성태윤 교수는 “구조조정은 단호한 의지가 없다면 이뤄질 수 없다”며 “전체 경제상황을 총괄하는 기재부에서 컨트롤타워를 맡는게 그나마 포퓰리즘적 정치논리를 완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