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체류 20만 시대]리룽·리샤오 형제, 무너진 코리아 드림..불법체류 5년 남은 건 70만원

by전상희 기자
2016.05.10 06:30:00

밀린 임금 달랬더니 "신고하겠다" 엄포
임금 안 주고 수수료 떼가고..강제출국 두려워 하소연도 못 해

중국 동포들이 많이 사는 서울 지하철2·7호선 대림역 인근의 한 직업소개소에 외국인 근로자를 구하는 일자리 광고가 빼곡히 붙어 있다. 연합뉴스
[이데일리 전상희 기자] “곧 결혼하는데 돈이 좀 모자라서 그래. 조금만 더 기다리라니까…”

넉 달이 지났지만 수화기 너머 중국동포 김모(30)씨는 여전히 같은 말만 반복했다. 중국 한족 출신 불법체류자 리룽(李龍·29·가명)·리샤오(李嘯) 쌍둥이 형제는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경찰 신고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쉬는 날 없이 일해 번 돈이었지만 불법체류자 신분이 들통나 강제 출국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서다. 딱한 사정을 들은 이주노동자 상담가는 “범죄 피해자의 경우 신고를 해도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상이 통보되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용기를 내서 지난 2월 상담가와 처음 경찰서 문턱을 넘었지만 “불법체류자 사건을 다뤄도 되느냐”는 핀잔이 돌아왔다. 일선 경찰관이 ‘통보의무 면제 제도’를 몰랐던 탓이다. 정부는 2013년 3월부터 피해자 구조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불법체류 등 외국인 신상정보를 출입국사무소에 신고하지 않아도 되는 통보의무 면제제도를 시행 중이다.

회색 후드티에 빛바랜 청바지 차림을 한 형제의 어깨는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형제가 공사판 반장인 중국동포 김씨를 따라 경남 김해의 건설현장으로 내려간 것은 지난해 9월이다. 힘들고 위험해 남들이 꺼리는 대표적 3D(Dirty·Difficult·Dangerous) 일자리지만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도 되는 건설현장은 형제에겐 최선의 일자리였다. 정식 고용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김씨만 따라다니면 됐다. 비록 일당 일부를 수수료로 떼였지만, 하루 10만원은 형제에게 큰 돈이었다.

김씨는 본인 명의로 통장을 만들 수 없던 형제에게 자신의 친척 명의로 통장을 만들어 임금을 대신 받아줬다. 형제는 김씨의 세심한 배려가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일을 시작한 지 석 달쯤 지났을까, 김씨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돈을 주지 않았다. 주변에선 김씨가 도박으로 돈을 모두 날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형제의 말에 김씨는 “그래 봤자 불법체류자를 도와주는 곳은 없다”며 되레 윽박질렀다.



임금을 떼인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2012년 처음 한국에 와 건설현장을 떠돌던 형제는 지난 2014년 경기 여주의 한 건설현장에서 처음 임금 체불 피해를 당했다. “돈이 생기면 바로 주겠다”던 사장은 차일피일 지급을 미뤘고 밀린 임금은 1000만원을 넘어섰다. 근로계약서를 쓴 것도 아니고 불법체류자 신분에 한국말마저 서툰 형제는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결국 사장은 야반도주했다.

이듬해 울산에서 일한 곳의 업주도 임금을 떼어 먹긴 마찬가지였다. 불법체류 사실이 들통나 한국땅에서 쫓겨날까 두려웠던 형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자꾸 귀찮게 하면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신고하겠다”는 엄포에 숨죽여 기다리던 형제는 생활고에 시달리다 결국 울산을 떠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섰다. 2년이 지났지만 울산 업주는 아직 “곧 주겠다”는 말 뿐이다.

대전에서 시작해 여주·울산·김해 등 전국 곳곳의 건설현장을 돌면서 형제가 떼인 임금은 수천 만원이다. 하지만 불법체류자라는 신분 탓에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도 강제 출국이 두려워 그간 노동청이나 경찰서에 진정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관계 당국의 감시를 피해 건설현장 숙소와 일터만 오간 탓에 한국말이 서툴렀던 것도 발목을 잡았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임금 체불을 당한 국내 외국인 근로자 수는 1만 6300명이다.

고향인 중국 지린성(吉林省)을 떠나 스물 다섯 나이에 한국땅을 밟으면서 형제는 ‘이모부처럼 딱 10년만 고생하자’ 고 약속했다. 1990년대 중반 무일푼으로 한국에 건너 간 이모부는 10년 간 모은 돈으로 귀국후 버스 두 대를 구입해 굴리면서 사장님 소리를 듣는다. 이모부는 틈만 나면 형제에게 ‘’‘한국은 기회의 땅’이라고 부추겼다.

형제는 고향을 등지면서 인생역전까지는 아니어도 결혼자금은 마련해 돌아가자고 다짐했다. 브로커를 통해 관광비자를 만드는 데 2400만원이 들었다. 친척집을 돌아다니며 어렵게 마련한 돈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친척들에게 빌린 돈은 지난달 겨우 다 갚았다. 이제 형제가 가진 돈은 70만원 뿐이다. 김씨가 결혼 준비 때문에 급전이 필요하다며 빌려가 갚지 않고 있는 돈은 형제의 결혼자금이기도 했다. 형제는 이제 포기하고 한국을 떠날지 아니면 좀 더 참고 견뎌볼지 고민 중이다. 형제에게 ‘코리아 드림’은 악몽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