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간 글로벌 신약 10개 만들겠다더니…씁쓸한 정부 R&D 자화상
by천승현 기자
2015.01.19 03:00:00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 올해 예산 65% 삭감
임대료 절감 위해 3년만에 사무실 이전
제약업계 "정부, 산업육성 의지 물음표" 비판
[이데일리 천승현 기자] 지난 17일 토요일,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KT&G서대문타워에 대형 이삿짐 차량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평소같으면 적막했을 시간이지만 이날만은 이삿짐 트럭 서너대가 사무실 집기와 서류상자를 가득 싣고 분주하게 어디론가 떠나기를 반복했다.
이날은 이 건물 14층에 있던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이 경기도 성남시 판교 인근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지난 2011년 9월 이곳에 둥지를 튼지 3년여만에 이사가는 이유는 예산 때문이다. 올해 운영 예산이 지난해보다 대폭 깎이면서 임대료를 줄이기 위해 30여㎞ 떨어진 곳으로 사무실을 옮겨야했다.
지난 2011년 9월 출범한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은 국내 유일한 범정부 차원의 제약 연구개발(R&D) 지원 사업이다. 미래창조과학부, 산업통상자원부, 보건복지부 등이 부처 경계를 초월한 R&D 투자를 통해 글로벌 신약 10개 이상을 개발하겠다는 목표로 설립됐다. 후보물질 발굴부터 상품화 단계에 이르는 신약 개발 전주기를 지원하는 최초의 프로젝트다. 지난 3년 동안 67건의 R&D 과제에 대해 지원을 결정했고, 8건의 기술이전 성과를 내면서 정부 R&D 사업의 컨트롤 타워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정부는 오는 2020년까지 10년간 1조600억원(정부 5300억원, 민간 5300억원)을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벌써부터 예산 문제로 삐걱대는 모양새다.
사업단이 출범할 당시 4년째인 올해 예산은 750억원으로 계획됐지만 실제 반영된 예산은 34.8%인 261억원에 불과했다. 인건비 등에 소요되는 운영예산도 지난해 28억원에서 올해 21억원으로 25% 삭감됐다.
사업단 관계자는 “올해 예산으로 임대료를 감당하기엔 너무 벅차다고 판단, 서둘러서 새 사무실을 구했다”고 말했다. 사업단은 판교 이전으로 연간 약 2억원 가량의 임대료를 절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0여명 연구원들의 인건비도 삭감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다. 사업단 연구원들은 기업, 대학, 병원 등이 지원한 R&D 과제를 평가하는 업무를 담당하며 주로 박사급 최고급 인재들로 구성됐다.
무엇보다 예산 삭감으로 R&D 지원이 위축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사업단이 기업에 지원금액을 결정하면 기업은 사업단 지원 금액 이상을 내놓는 매칭 방식으로 운영된다.
당초 계획대로 올해 사업단 R&D 지원 예산이 722억원으로 책정됐다면 민간 자금과 함께 1444억원이 R&D에 투입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산이 240억원으로 삭감되면서 총 R&D비용도 480억원으로 약 1000억원 감소가 불가피해졌다.
예산 삭감의 이유는 지난해 투입하고 남은 불용 예산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지원 대상이 결정될 때마다 투입 금액을 결정하는 특성상 일정금액의 예산이 남기도 했다. 2011년 55.7%, 2012년 11.2%, 2013년 37.2%가 이월되면서 지난 3년간 평균 이월액 비율은 34.6%에 달했다. 사업단 측은 “과제 특성에 따라 지원금액을 정하기 때문에 R&D 예산은 모두 다 쓸 수도 없는 상황이다”면서 “R&D 단계가 진행될 수록 지원금액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고 설명했다.
주상언 범부처신약개발사업단장은 “올해 책정된 R&D 예산 240억원 중 160억원 가량은 이미 올해 투입되기로 결정돼 새롭게 투입할 수 있는 예산은 많지 않다”면서 “R&D 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예산 삭감으로 올해 지원이 위축될까 걱정이다”고 토로했다.
제약업계에서도 정부 R&D 지원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실제로 사업단이 출범할 당시 정부는 목표를 ‘2020년까지 글로벌 신약 10개 이상 개발’로 설정했다가 지난 2013년 ‘2020년까지 글로벌 신약 10개 이상 기술수출’로 수정했다. 통상 후보물질 발굴부터 신약개발까지 20년 가량 소요되는데 애초부터 정부가 실현 불가능한 목표를 제시했다는 지적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신약 연구는 과제에 따라 수백억원의 R&D 비용이 투입될 수도 있는데 작년 예산이 남았다는 이유로 예산을 삭감하는 것은 제약산업 육성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방증”이라면서 “범정부 차원의 R&D사업이 3년만에 삐걱대는데도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