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박수익 기자
2014.02.14 07:00:00
[이데일리 박수익 이도형 기자] 국내 굴지의 A기업은 국회의원의 출판기념회 ‘책값’을 세 부류로 나눈다. 이른바 C등급(직접 관련이 없는 의원)은 50만원, B등급(상임위 등 관련이 있는 의원)에겐 100만원 식이다. 그리고 A등급 이른바 중점관리가 필요한 의원의 출판기념회에 전달하는 봉투 안 금액은 의원과 해당기업외엔 아무도 모른다는 후문이다.
민간기업보다 자금력 떨어지는 공기업 B사 역시 출판기념회를 모른 척 지나갈 수 없다. 모든 의원들의 행사를 챙기기는 어렵지만, 소관 상임위 의원들에게는 화환과 함께 10~20만원을 봉투에 담아 책값으로 낸다. 책 구입에 쓰는 돈은 임원들이 십시일반 마련한다.
정치인들의 삶은 흔히 ‘교도소 담장 위 걷기’로 비교된다. 정치는 곧 조직싸움으로 인식되고, 조직관리는 곧 돈으로 연결되는 정치현실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돈 먹는 하마’로 불리며 지구당을 폐지했지만, 현실은 자금을 대는 주체만 비꼈을 뿐 예전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중앙당 보조가 안 되더라도 지역사무소는 관리해야하고 결국 돈 나올 통로를 찾아야 한다.
정치자금 투명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 일명 ‘오세훈법’(2004년 개정된 정치자금 관련 법안)도 마찬가지다. 이 법으로 정치인의 합법적 후원금 모금 한도가 연간 1억5000만원으로 정해지고, 기업 등 법인의 후원금 기탁이 전면 금지되면서 노골적인 정경유착의 시대는 종식됐지만, 이른 ‘후원금 쪼개기’라는 편법까지 막지는 못했다.
국고보조금이나 선거비용 보조 등은 그대로 둔 채 규제만 강화한 결과는 2010년 ‘청목회 사건’(청원경찰친목회의 후원금 로비사건)으로 현실화됐다. 청목회사건 이후 이익단체 등 기관이 소액 후원금을 나눠서 내는 행위마저 여의치 않게 됐지만, 또 다른 풍선효과가 나타났다.
최근 편법과 합법 사이를 교묘하게 지나가는 출판기념회도 그 중 하나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살아온 인생철학과 의정활동 경험을 묶어 펴낸 300페이지 남짓한 책은 여느 베스트셀러 못지않게 완판 행진을 이어간다. 특히 1만5000원 안팎인 책값은 10만원에서 많게는 100만원 이상에 팔리기도 하면서 인기스포츠 암표 거래를 무색케 할 정도다.
현행법상 개최시기(선거 90일전)를 제외하면 별다른 규제가 없는 출판기념회가 ‘음지의 후원회’라는 비판이 고조되자 정치권은 다시 관련 제도 개선을 강조했다. 그러나 출판기념회를 막으면 미술전시회가 생길 것이라는 웃지 못 할 지적도 나온다.
무조건 정치자금을 줄이거나, 한쪽만 규제해 또 다른 변칙을 양산하는 즉흥적인 대안보다는 근본적 제도개선을 모색해야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는 이유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유럽식으로 국고보조금을 대폭 늘리지 않는 이상 정치인이 조직관리과 선거를 치르기 위해서는 돈이 드는 게 사실인데 무조건적인 규제와 한도축소보다는 정당한 후원을 받을 수 있는 투명한 틀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정치적 의사표현으로서 후원을 당당히 권장하는 사회 풍토 조성도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