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시간제 '부익부 빈익빈'…中企 '결사반대' vs 대기업 '무관심'

by정병묵 기자
2023.04.05 05:00:00

중소기업 "현재 주말·야근 수당도 못 봤는데" 우려 커
IT 업계 "야근 잦지만 현 52시간제로 충분히 커버 가능"
대기업 "現 연장근로 수당·대휴 잘 지켜져…별 관심 없어"
"업종 간 상황 달라…더 세심한 논의 먼저 이루어져야"

[이데일리 정병묵 김영환 김정유 김응열 기자] 정부가 검토 중인 근로시간 확대 개편안에 대해 MZ세대 직장인 상당수가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는 이유는 사측의 악용 가능성과 실효성 때문이다. 특히 근로시간제도 개편에 부정적인 입장이 강한 중소기업계와 게임·정보기술(IT)·광고 등 근로시간이 일정치 않은 업종에서도 근로시간 제도 개편에 대한 의문과 우려가 큰 상황이다. 다만 이미 주 52시간 근로제가 정착해 추가근무 수당과 대체 휴무가 잘 지켜지는 대기업 사원들은 개편 여부에 큰 관심이 없는 모양새다. 기업 규모나 업종에 따라 온도차가 매우 달라 더 폭넓은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그래픽= 김정훈 기자)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 3월 14~28일 20~39세 개인회원 30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를 보면, ‘주 52시간 근무제 개편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복수응답)’에 대해서는 ‘휴무가 안 지켜지고 총근로시간이 길어질 것 같아서’가 80.6%로 가장 많았다. 이어 △야근·초과근무가 만성화될 것 같아서(73.6%) △법을 악용하는 기업들이 있을 것 같아서(70.5%)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현재 재직 중인 회사에서 주 52시간 근무제가 잘 지켜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잘 지켜지고 있다(63.8%)’가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36.2%)’는 응답보다 훨씬 많았다.

이번 개편안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중소기업에 재직 중인 MZ세대는 소규모의 회사일수록 적정근로시간 준수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냈다.

한 제조 중소기업에 다니는 C씨는 “주 69시간제를 시행하면 전주에 일을 많이 했다고 이번 주에 일을 줄이고 빨리 퇴근할 수 있는 분위기가 과연 될까 의문”이라며 “야근이 충분히 길어질 수 있는 문화를 가진 회사들은 이를 악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외국계 중소기업에 다니는 30대 영업사원 D씨는 “야근이 일상이었지만 주 52시간 제도가 시행되면서 특정 시간이 되면 컴퓨터가 자동으로 꺼진다든지 근무를 강제하는 문화가 없어졌다”며 “주 52시간제에서 월말에는 조금 더 일찍 퇴근할 수 있었는데 69시간제가 도입되면 악용될 소지가 높다”고 전했다.

IT 업계에서도 업의 특성상 야근이 잦지만 굳이 69시간까지 늘릴 필요는 없다는 반응이다. 코로나19 전부터 자율 출퇴근제가 정착해 현재도 탄력적으로 근로시간을 조절할 수 있어서다.

한 게임회사에 다니는 20대 후반 여성 E씨는 “업데이트 등의 이슈가 있을 때 늦은 밤에 퇴근하는 일이 잦은데 주 52시간 내에서 해결 가능하다”며 “69시간으로 늘어나면 늦게 퇴근하는 날이 더 늘어날 것 같아 결사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피력했다.



한 중견 소프트웨어 기업에 다니는 30대 후반 남성 F씨는 “소프트웨어 개발은 자율성과 창의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근무시간이 길다고 생산성이 더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라며 “회사도 직원들이 오래 일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한 광고업체에 다니는 G씨는 “연장 근무 시 휴가를 제공한다고 하는데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모르겠다. 전체 근무 시간만 더 늘어날 것 같다”면서 “초과근로에 대한 보상이 가장 중요한데 이에 대한 보상 체계가 잘 정착돼야 할 것 같다”고 언급했다.

성수기, 비수기가 명확한 패션업계에서는 일부 찬성 의견도 있었다. 한 패션회사에서 근무하는 여성 H씨는 “일이 몰아치는 성수기 시즌이 있는데, 이 때 법적으로 한 주에 12시간 이상을 법적으로 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효율적이었다”며 “개편이 된다면 고용을 더 할 수 없는 중소기업이나, 연장 근무로 더 많은 수당을 벌고 싶어하는 근로자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게임업체에서 팀장급으로 일하는 30대 남성 H씨는 “게임 출시 막바지에 근로시간을 지켜가면서 일하고, 조직 관리하는 것도 스트레스였다”며 “휴식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몰입도 있게 일하는 시기와 쉬어가는 시기를 적절히 조절할 수 있을것 같다”고 찬성했다.

민주노총 청년회원들이 3월 15일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열린 근로시간 기록, 관리 우수사업장 노사간담회장에 들어와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 뒤에서 피켓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반면 대기업 직원들은 주 69시간 근로제 개편에 대해 관심이 적은 편이다. 정부가 주 69시간제를 홍보하면서 언급한 ‘공짜야근’ 우려가 이미 없다고 판단해서다. 주 52시간제 도입 이후 근무시간을 정확히 준수하고 이에 맞춰 수당이나 대체휴무도 지급하고 있다.

실제 삼성전자(005930)는 2018년 정부의 ‘포괄임금제 원칙적 폐지’ 방침에 따라 한 달에 20시간 연장근로를 가정한 고정시간 외 근무 수당을 지급하고 기존 포괄임금제도를 폐지한 상태다. 이 수당은 월 20시간 근무를 하지 않더라도 받을 수 있다. 월 20시간이 넘어가면 추가로 급여를 지급한다.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초과근무한 만큼 다른 날에 단축근무할 수도 있다. 한 달 기준으로 총 근무시간만 맞추면 된다.

IT 대기업에 다니는 30대 여성 I씨는 “근무시간을 엄격하게 관리할 뿐만 아니라 초과 수당도 분(分)단위로 지급하다 보니 별로 동요는 없다”며 “이번 달 법적으로 근무가 가능한 시간을 중간에 알려주고 휴식을 취하라는 알림도 보낸다. 법정근로시간을 초과하기 전에 PC가 강제로 꺼지기도 한다”고 설명다.

다만 MZ세대 근로자들은 주 69시간제 논의가 너무 성급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유통업계 종사자인 J씨는 “업계마다 다 상황이 다른데 성급하게 주 69시간제라는 의제를 던져 놓고 사회적 혼란만 야기한 것 같다”며 “도입이 필요하다면 사전에 충분한 조사를 거쳤어야 혼란이 적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