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집 상처투성이 풍경…목판화 말고 '목판'을 걸었다

by오현주 기자
2022.04.09 06:30:01

△갤러리도스서 개인전 연 작가 김희진
섬세하게 도려낸 나무판에 먹·색 입혀
물감 올려 원판에 찍어낸 종이화 대신
파이고 깎인 상처 무릅쓴 원판을 걸어
"특정시간 특정장소에 존재한 내 흔적"

김희진 ‘사이트#46 모두의 마음 깊은 곳’(Site #46 Deep Inside Everyone’s Mind·2020), 나무판에 먹·수채, 30×29㎝(사진=갤러리도스)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오톨도톨한 격자로 짜인 풍경. 하늘이고 땅이고 돌이고 벽인 듯한 그 격자들이 집을 세우고 마을을 만들고 세상을 빚었다. 나무판을 섬세하게 도려내고 먹을 입히고 색을 앉힌 풍광. 작가 김희진(36)이 칼을 들이대 파내고 새긴 뒤 ‘사이트#46 모두의 마음 깊은 곳’(Site #46 Deep Inside Everyone’s Mind·2020)이란 타이틀을 단 작품이다.

작가는 목판에 그림을 그린다. 흔히 말하는 ‘목판화’와는 다르다. 원판에 물감을 올려 종이에 찍어낸 나무의 흔적이 아니라 파이고 깎인 나무 자체기 때문이다. 그 상처를 무릅쓰고 올린 이미지는 눈앞에 없는 기억을 더듬어낸 것이란다. “특정 시간 특정 장소에 존재했던 내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나무판에선 여기가 어딘지, 저이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게 된 풍경 한 토막만 빠져나왔을 뿐이다.



결국 “내가 만들었는데 내 것이 아닌, 내게 나무를 파는 행위는 그 작업을 떠나보내기 위한 준비과정이더라”고 했다. “말끔했던 나무를 내 생각·의미를 담은 불완전한 사물로 바꿔버렸을 뿐”이라지만, 저 ‘불완전한 사물’이 우리에게 자꾸 말을 거는 건 작가도 몰랐을 거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7길 갤러리도스서 여는 개인전 ‘희미해진 푸른 증거’(Faint Blue Evidence)에서 볼 수 있다. 전시는 12일까지.

김희진 ‘사이트#50 오래된 것이 새로운 것(Site #50 The Old Is New·2021), 나무판에 먹·수채, 45×45㎝(사진=갤러리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