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건 모른다 말해야"…정통 한은맨과는 다른 이창용의 소신

by이윤화 기자
2022.04.03 08:34:25

인사청문회 준비TF 첫 출근한 이창용 한은 총재 후보자
"하루하루 불확실성 커"…경제지표 충실한 유연성 예고
"정부정책과는 긴장 속 조화"…통화정책 한계도 분명히
"최근 단순매입 안한 건 적절"…시장 요구 추종 않겠단 뜻

[이데일리 이윤화 기자] 이창용 신임 총재 후보자가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퇴임 이튿날인 1일 오전 9시 인사청문회 준비를 위한 태스크포스(TF)에 첫 출근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아시아태평양 국장으로 국제금융기구 최고위직에 오른 석학인데다가 이명박 정권 초기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인수위원, 금융위원회 부위원장 등 경제정책 경험을 두루 갖춘 이 후보자는 첫 출근부터 조심스럽지만 명확한 메시지를 전하는 소통 방식으로 정통 한은맨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 후보자가 1일 오전 서울 중구 세종대로 부영태평빌딩에 마련된 인사청문회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노진환 기자)


이 후보자는 서울 중구 소재 부영태평빌딩 1층 회전문을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다른 사람들과 섞여 입장했지만, 190cm가 훌쩍 넘는 큰 키 덕에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 후보자가 나타나자 기자들과 한은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이날 현장에는 TF의 총책임을 맡은 배준석 부총재보와 홍경식 통화정책국장, 채병득 인사경영국장 등 임원진과 한은 공보실 직원들이 모여 그를 맞이했다.

이 후보자는 긴장된 듯 머리와 안경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포토라인 앞에 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다소 긴장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그러나 이내 “수고가 많다”는 첫 마디로 인사를 건네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보자 지명을 축하한다며 소감을 묻자 그는 “아직 청문회 절차가 남아 있다”면서도 기자들이 던진 질문에 성심껏 답변했다.

여러 색과 무늬가 섞인 넥타이를 맨 채 등장한 이 후보자의 눈빛에서 고차방정식처럼 꼬인 통화정책 여건에 대한 깊은 고민이 엿보였지만, 그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물가에 대한 전망을 묻자 “상반기 중엔 한은이 예상한 3.1%를 웃돌 것으로 보이지만 하반기 전망은 아직 모르겠다. 우크라이나 상황, 중국 내 코로나19 확산 등 하루하루 불확실성이 큰 만큼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한은의 임무”라며 소신을 보였다.

이 후보자의 태도는 `데이터를 보고 판단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이는 전임 이주열 총재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다. 43년간 한은맨으로 근무했던 이 전 총재는 `경기와 물가를 선제적으로 예측하고 대응`하는 것에 중점을 뒀다. 이 때문에 그는 지난달 말 가진 송별 간담회에서 “통화정책은 파급 시차 때문에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태생적 어려움이 있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소회를 밝힌 바 있다.



특히 이 후보자가 이날 가장 강조한 건 정부정책과 긴장 관계를 가지되 조화를 이루는 것, 통화정책 성향을 구분 짓지 않는 유연한 태도였다. 이 후보자는 통화정책이 재정 부양정책을 이어가려는 정부와 갈등을 빚을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당연한 긴장과 갈등`이라고 표현하며 그 속에서 조화를 이뤄낼 것이란 포부를 밝혔다. 그는 “물가 안정을 중시하는 중앙은행과 성장을 목표로 하는 정부와의 긴장은 당연하다”면서 “전 세계 통화정책 흐름이 이를 당연하게 여기고 조율하는 쪽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경기 하방 압력이 크고 물가는 상방 위험이 높은 상황에서 정부 재정정책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사이에 마찰을 빚을 가능성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한 셈.

가계부채 문제에 대해선 기준금리를 통해 조정해 나갈 것이라고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면서도 “중장기적으로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과 가계부채를 어떻게 해결할 지 고민하겠다”고 했다. 정부의 2차 추가경정예산안(추경)과 금융당국의 대출 규제 완화 상황에 대해서는 총재 취임 이후 거시경제 전반에 미칠 영향을 점검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후보자는 본인이 비둘기파(통화완화 선호)로 분류되는 것에 대해서는 당혹감을 드러내며 부인했다. 그는 “우크라이나 사태와 경기 하방 위험을 언급한 탓에 비둘기파라는 언론 보도가 많았는데 물가에 주는 영향도 만만치 않기 때문에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금통위원들과 함께 논의해 나갈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어 “매파(통화긴축 선호), 비둘기파로 나누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데이터 변화에 따라 매파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비둘기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강조했다.

시장과의 관계 맺음에서도 무조건적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소신을 드러냈다. 지난달 28일 국고채 금리가 20bp(1bp=0.01%포인트) 이상 뛴 상황에서 한은이 단순매입을 하지 않은 것이 올바른 판단이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그는 “정부가 적자재정을 통해서 국채를 많이 발행해야 할 때 시장에 주는 영향이 크면 당연히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고 전제하면서도 “지난달 금리 급등은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의 `빅스텝` 언급 이후 우리 뿐만 아니라 홍콩, 호주 등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로 금리가 많이 오른 상황이었기 때문에 굳이 개입하지 않은 것이 적절했다고 본다”고 평했다.

한·미 금리 역전 문제에 대해서는 “가능성이 크다”고 답변했지만, 2018년 미국 금리 인상기를 언급하며 시장 우려를 잠재웠다. 그는 “2018~2019년 미국이 금리를 빨리 올림에 따라 격차가 있을 때 자본은 오히려 순유입한 사례가 있다”면서 “금리 역전 가능성은 크지만, 그보다 금리 역전으로 인한 환율 변동과 물가 영향에 더 집중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런 이 후보자의 명확한 발언에 시장은 곧바로 반응했다. 특히 기준금리 인상에 민감한 국고채 3년물 금리가 전 거래일보다 12.1bp 오른 2.784%에 최종 호가되며 연중 최고치를 다시 썼다. 2014년 6월 12일(2.789%) 이후 7년 10개월래 최고 수준이다.

한편 이 후보자는 국회 청문회 일정이 정해질 때까지 매일 TF 사무실로 출근할 예정이다.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이르면 이번 주 초 국회에 인사청문회 요청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지만, 오는 14일 금융통화위원회까지는 2주도 채 남지 않아 이달 회의 주재는 불가능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