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겸의 일본in]日정부가 원전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부르는 이유

by김보겸 기자
2021.04.19 00:46:48

日,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출 설명하면서
안전성 강조하려 오염수 대신 ''처리수'' 고집
피폭우려는 ''소문에 의한 피해''로 심각성 축소

일본 후쿠시마 앞바다. 지난 13일 일본 정부가 후쿠시마 오염수를 해양 방출하기로 공식화했다(사진=AFP)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국가가 이해관계자가 얽혀 있는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는 적확한 언어로 사태를 설명하고 이해 당사자를 설득해야 한다. 물론 어려운 일이다. 결정을 합리화하기 위해 사태의 심각성을 축소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최근 자국은 물론 인접국까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중대 발표를 하면서 그런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모양이다. 지난 13일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출을 공식화하며 오염수 대신 ‘처리수’라는 표현으로 심각성을 희석했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다.

일본 정부는 후쿠시마 오염수를 ‘처리수’라고 표현한다. 방사성 물질인 삼중수소(트리튬)를 제외한 나머지는 알프스(ALPS·다핵종제거설비)로 처리돼 안전하다는 이미지를 주기 위해서다. 폭발한 핵연료를 식히기 위해 주입한 물에 방사성 물질이 들어 있는건 오염수고, 알프스로 제거한 게 처리수이니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것이다.

처리수냐, 오염수냐를 놓고 일본 언론에서도 표기가 엇갈렸다. 진보성향의 아사히신문과 중도성향 마이니치신문은 각각 ‘처리된 오염수’, ‘오염 처리수’라고 표현했다. 마찬가지로 진보성향의 도쿄신문은 제목에 ‘처리수’라고 언급했지만 본문에서는 ‘오염수를 정화처리한 뒤 방사성 물질인 삼중수소를 포함한 물’이라 썼다.

NHK 월드 재팬 홈페이지에 “오염수라는 표현이 방사성 물질을 제거하지 않고 방출한다는 오해를 줄 수 있어 ‘처리수’라고 정정한다”는 글이 올라와 있는 모습(사진=NHK 월드 재팬)
‘처리수’라고 단언한 곳은 보수성향의 요미우리신문과 우익성향 매체로 분류되는 산케이신문이다. 공영방송 NHK가 뒤따랐다. 영어방송인 ‘NHK 월드 재팬’에서 ‘방사능으로 오염된 물(radioactive water)’이라고 보도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으면서다. 이후 NHK는 “오해를 줄 수 있다”며 ‘처리수(treated water)’로 정정했다. 오염수라는 표현이 ‘풍평 피해(風評被害)’로 이어진다는 주장도 나온다. 세상에서 이러쿵저러쿵 수군거리는 소문에 의한 피해라는 뜻이다. 이런 주장은 오염수가 실제로는 해롭지 않지만 근거없는 뜬소문로 과도한 불안감을 조성할 우려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산케이는 사설에서 “어민들과 정부에 있어 공통의 적은 소문에 의한 피해”라며 “근거없는 소문에 져선 안 된다”고 논평했다.



호소노 고우시 전 환경상은 트위텅 일본 부흥청이 광고회사 덴쓰에 3년간 10억엔을 들여 ‘소문 피해’를 불식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마이니치신문 기사를 공유하며 “후쿠시마에 타격 주는 소문을 없애기 위해 국가가 대응하는 건 당연하다”며 반박하고 있다 (사진=트위터)
정치권에서도 ‘소문에 의한 피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모양새다. 단연 눈에 띄는 이는 호소노 고우시 전 환경상이다. 그는 연일 트위터에 일본 정부 결정을 비판하는 언론 기사를 올린 뒤 “과학에 기초해 보도하라”, “오염수라는 표현이 소문 피해를 키울 수 있다”며 공개저격하는 데 열심이다.

주목되는 건 그의 이력인데, 야당인 민주당 출신으로 민주당이 집권하던 2011년 3월 동일본대지진이 일어난 뒤 같은해 4월 원전사고 홍보 담당을 맡았다. 민주당 내부에서도 보수색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그는 현재 자민당과 무소속 모임이라는 교섭단체 소속이다. 아직 자민당 입당을 인정받지는 않은 상태라 스가 정권의 주장에 힘을 실어줌으로써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것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아소 다로 부총리는 오염수 해양방출을 결정한 지난 13일 “그 물을 마시더라도 별일 없다”고 말해 빈축을 샀다(사진=AFP)
아소 다로 부총리는 오염수 해양방출을 결정한 지난 13일 “그 물을 마시더라도 별일 없다”고 말해 빈축을 샀다. 오염수에 들어있는 삼중수소는 빗물과 바닷물 등 자연상태에도 존재하며 체내에 쌓이지 않아 안전하다는 건데, 문제는 삼중수소 말고 다른 방사성 물질은 과연 제대로 걸러지고 있느냐다.

지난 2018년 오염수의 약 80%가량에 세슘과 스트론튬 등 치명적인 방사성 물질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기술적으로 제거하기 어려운 삼중수소 제외하면 방사성 물질 62종을 걸러낼 수 있다”는 도쿄전력 설명과도 배치된다. 2년 뒤 오염수를 바다로 흘려보낸 후 국제사회와 함께 모니터링 상황을 투명히 공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약속이 미덥지 못한 이유다.

아사히신문을 비롯한 진보 성향 언론과 야당은 정부 결정을 납득하지 못하겠다며 객관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설명을 촉구하고 있다. 방사성 물질이 충분히 걸러지지 않았는데도 오염수를 ‘처리수’라 명명하고, 내부 피폭 리스크를 배제할 수 없는 오염수를 바다에 쏟아 붓는 데 따른 우려를 ‘소문 피해’로 일축해버리는 건 사태를 은폐하려는 시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지난 13일 시위대가 일본 도쿄 총리공관 앞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해양방출을 반대하고 있다 (사진=AF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