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참사 현장 의료단장이 본 이태원 사고는
by이지현 기자
2022.11.11 05:11:17
왕순주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 인터뷰
갑작스러운 밀려듦 출퇴근 지옥철 탑승과 달라
질서 안 지키면 죽을 수 있단 경각심 가져야
[이데일리 이지현 기자] “(이태원사태는) 우리가 미진했던 부분에서 발생했다. 이때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다.”
왕순주 한림대동탄성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10일 이데일리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했다. 그는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참사 당시 서울대병원 현장의료지원단장으로서 현장을 지켜봤다. 당시 참사도 충격적이었지만, 이태원참사는 누구나 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 30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는 점에서 온 국민을 더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그동안 정치적인 발언으로 비칠까를 염려해 인터뷰를 자제해왔던 그는 안전인식 제고를 위해선 지금을 적기라고 판단하고 인터뷰에 나섰다.
이번 참사의 원인으로 정부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crowd management·군중 관리) 부족’을 꼽았다. 외신은 ‘크라우드 크러시(crowd crush)’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
왕순주 교수는 용어정리부터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람이 일정공간에 정도 이상으로 많이 있게 되면 주위의 다른 사람에 의한 압력을 받게 되며 촘촘하게 꽉 끼는데 이를 ‘크라우드 패킹(Crowd Packing)’으로 부른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손상이 가해지는 것을 ‘크라우드 크러시(crowd crush)’라고 한다. 군중이 다쳤느냐가 기준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 천천히 질서 있게 빠져나가면 피해를 줄이거나 예방할 수 있지만, 통제되지 않을 경우 군중이 밀도가 높은 인파 쪽으로 몰려들어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둥둥 떠서 이동하는 ‘크라우드 써지(Crowd Surge)’를 발생시킬 수 있다. 또 경사가 지거나 위아래로 군중이 포개져서 밀집된 대열이 무너지면서 깔리는 ‘크라우드 컬랩스(Crowd Collapse)’도 나타날 수 있다.
왕순주 교수는 “어느 정도 높이가 있는 곳에서 밀집된 군중을 내려다보면 조류와 같은 흐름을 볼 수 있다”며 “일정한 방향으로 흘러가면 상대적으로 안전한데, 흐름이 관리되지 않으면 회오리처럼 와류가 생긴다. 이를 ‘크라우드 터뷸런스(Crowd Turbulance)’라고 한다. 이럴 때 관리자가 전반적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도록 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현장과 그 정보를 공유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태원 사태는 이런 위험상황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고 관리도 되지 않았다. 현재 정부는 사고원인을 파악하기 위해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만, 정확한 사고원인을 파악하기 위한 전문가 참여 CCTV 분석 등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왕 교수는 “CCTV를 함께 분석하자는 요청이 아직 없었다”며 “당시 상황을 보지 않고선 구체적인 사고원인을 뭐라고 얘기할 순 없을 거 같다”고 말을 아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출퇴근 지하철과 만원 버스에서도 비슷한 사고가 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왕 교수는 “지옥철이라고 하는 출퇴근 지하철의 경우 사람이 어느 정도 타고 더 안 들어가면 다음 차를 타는데, 이태원의 경우 다음 차를 타야 하는데 사람이 계속 들어온 거다. 그래서 조금 다르다”고 지적했다.
과거 비슷한 사고로는 2005년 상주 콘서트 압사사고가 꼽히고 있다. 공연을 보러 관객이 몰리며 11명이 압사하고 7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는 “상주참사의 경우 병목현상이 역할을 했던 경우”라며 “이태원의 경우 그때와 다르다”고 구분했다. 이어 “집회를 약속한 게 아닌 자생적으로 일어난 거여서 경찰 등과 같은 공공부문에서 예측해서 관리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었는데, (이들이) 행정적으로 접근하다 보니 미진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충분히 예방과 관리를 할 수 있음에도 제도와 법규만으로 접근하다 보니 상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인명피해가 있을 거냐? 어느 정도 해를 미칠 것이냐? 등을 기준으로 따졌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사고는 해외에서 종종 발생했지만, 국내에선 흔치 않은 사고였다. 대부분의 집회나 행사가 넓은 곳에서 이뤄지다 보니 언제나 사고 가능성은 있었지만, 대형 사고로 이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이렇다 보니 현장 관리자도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았고 연구가들도 관련 연구에 소홀했던 게 사실”이라며 “모두가 조금씩 책임을 나눠 가져야 할 부분”이라고 짚었다.
이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인명피해가 나는 모든 상황을 가정해서 책임지겠다는 접근법으로 가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회가 변하고 테크놀로지가 발전하면서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사고나 재난이 일어나고 있다”며 “외국에서 발생했던 것들 등 다양하게 분석하고 가정해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판을 새로 짜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조직의 해체와 결합은 해답이 될 수 없다고 봤다. 삼풍백화점 붕괴참사와 대구지하철 참사, 세월호 참사는 재난 패러다임을 바꾼 3대 재난으로 꼽힌다. 삼풍백화점 참사 이후 재난관리법이 만들어지고 응급구조사 제도와 응급의학과라는 전문과목이 만들어졌다. 관련법이 생기며 종사자들의 현장 통제가 가능해졌다. 대구지하철참사 이후에는 소방방제청이 출범했다. 내무부 소방국을 떼어내 소방과 방제를 전문적으로 맡는 기관이 탄생한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는 해양경찰을 해체하고 소방과 합쳐 국민안전처를 출범시켰다. 하지만 이들 조직은 오래가지 못했다. 물리적 결합은 화학적 결합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결국 찢어지고 말았다. 왕 교수는 “정치적인 제스처에 불과했다”며 “실제로 일하는 사람의 행동패턴과 국민의 인식을 바뀌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안전의 3단계 중 1단계는 장비구축, 2단계는 관련법 손질 3단계는 안전문화 확산이다. 그는 “우리나라는 3단계 중 2단계에 머물러 있다”며 “3단계의 경우 눈에 안 보이니 일을 한 것 같지 않아 잘 하지 않는다. 인식과 문화를 바꾸는 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진정한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꼭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지금을 인식개선의 적기라고 봤다. 시간이 지나면 안전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왕 교수는 “과거엔 질서를 지키는 게 시민의 의무라고 여겼다면, 이젠 ‘질서를 안 지키면 죽을 수 있다’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쉬운 것도 강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