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공태영 기자
2019.07.07 04:40:20
여름의 중심에서 외치는 겨울 제주
눈 덮인 한라산을 오르고 동백꽃도 보고
월정리에서 인생샷도 찍고 억새 바다에도 풍덩
추운 겨울에 동남아로 여행을 가면 추위 걱정을 안 해도 된다. 그럼 더운 여름에는? 어디 알래스카 같은 곳을 가면 더위 걱정이 싹 사라지지 않을까? 밖에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7월, 만약 지금 제주도가 겨울이라면? 그래서 겨울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면 어떨까?
흰 눈이 쌓인 한라산, 바닷바람이 세게 부는 겨울 바다 등 상상만 해도 땀이 증발해서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비록 현실엔 없지만 상상해볼 수는 있는 7월의 겨울 제주. 찬바람 부는 그곳으로 한번 여행을 가보자. 비행기는 이제 막 제주공항 활주로에 착륙했다.
한라(014790)산 - 대한민국 꼭대기에서 도시락 먹기
한라산을 빼놓고 제주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계절마다 다른 표정으로 사람들을 반기고, 올라가는 코스도 다양한 한라산은 쉽게 질리지 않는 매력을 갖고 있다. 한라산 하나를 보려고 제주도까지 찾아가는 사람들도 꽤 있으니 말을 다 한 셈이다. 겨울의 한라산도 매력 있기는 마찬가지다.
이른 아침에 해가 뜨기도 전에 오르는 산길은 길을 밟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 들리는 적막산하다. 눈 덮인 골짜기를 오르고 내릴 때마다 풍경은 확확 바뀌고, 시간이 지나 햇빛이 비치면 숨죽여 자고 있던 숲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한다.
꾸준히 백록담을 향해 오르다 보면 탁 트인 하늘이 나올 때가 있는데, 맑고 높은 하늘이 주는 청량감은 청량음료로도 맛볼 수 없는 것이다. 흰 눈에 덮인 산은 차갑고도 깨끗해서 미세먼지에 찌든 호흡기가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육지로 돌아가면 마시지 못할 공기니까 괜시리 숨을 더 열심히 쉬며 올라간다.
그렇게 점심때쯤 도착한 정상엔 기념사진을 찍고 도시락을 꺼내먹는 사람들로 활기가 넘친다. 백록담을 배경으로 인증샷을 남기고 뿌듯한 맘으로 먹는 점심은 세상에 이런 꿀맛이 없다. 대한민국 가장 높은 설산에서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도시락을 먹는 풍경이라니.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
동백꽃 - 제주의 겨울은 붉은색이다
겨울 제주를 여행할 때 즐길거리가 많은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건 단연 동백꽃이다. 보통 봄, 여름엔 꽃구경, 가을엔 단풍구경을 가는데, 겨울엔 눈구경 말고는 딱히 할 게 없다. 하지만 제주의 겨울은 다르다. 겨울이면 동백꽃이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기 때문이다.
카멜리아힐, 휴애리자연생활공원, 위미리 동백군락지 등 동백꽃 피는 곳이면 어디든지 때늦은 꽃놀이를 즐기려는 사람으로 붐빈다. 휑하고 쓸쓸한, 또는 흰색으로 뒤덮인 겨울 풍경 속에서 홀로 붉게 핀 동백꽃은 시선 강탈 그 자체다. 동백꽃을 배경으로 인생샷을 건지는 건 시간문제. 다만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으로 꽃밭에 몰리기 때문에 조용히 꽃구경만 하는 건 힘들 수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동백꽃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돌릴 수는 없다. 그곳에 겨울 제주의 진짜 색이 있기 때문에.
바다 - 분위기 있는 해변 또는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
제주도까지 왔는데 바다를 안 볼 순 없다. 한라산 꼭대기에 올라가도 바다가 보이는 곳이 제주다. 비록 겨울 제주의 바람은 어마무시하고 바닷가는 그 정도가 더하지만, 어쩔 수 없다. 겨울 바다가 부르니 갈 수밖에.
해변을 찾는다면 월정리가 핫플이다. 비록 카페나 식당이 해변을 잠식하고 사람과 차가 몰려들어 예전의 그 월정리가 아니라지만, 사람들이 많이 찾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달이 뜨는 바닷가(月汀里)’란 이름 뜻처럼 초승달 모양으로 뻗어 있는 백사장에 산호색 바닷물이 넘실거리고, 그 뒤로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모습은 평소 사진을 안 찍던 사람도 카메라를 찾게 만드는 풍경이다. 해질녘엔 여기에 타는 듯한 붉은 하늘까지 가세해서 정취를 극대화한다. 그 하늘 위로 작은 달이 떠오르면 이곳은 말 그대로 ‘달이 뜨는 바닷가’다.
모래와 파도가 있는 평범한 바닷가 말고 좀 특색 있는 곳을 찾는다면 중문 주상절리대와 용머리해안이 제격이다. 육각형 검은 돌들이 해안을 가득 메운 주상절리대는 누가 일부러 조각한 예술작품 느낌이 나는 곳이다. 검은색 돌에 부딪히는 푸른 파도를 보고 있자니 겨울인데도 가슴이 뻥 뚫리는 듯 시원해진다. 맑은 날은 맑은 날대로, 궂은 날은 궂은 날대로 분위기가 있어서 언제든 가기 좋은 곳이다.
용머리해안은 주상절리대와는 또 다른 매력의 예술작품이다. 해안을 따라 서 있는 암벽엔 파도와 바람의 흔적이 층층이 새겨져 있다. 마치 그랜드캐니언의 일부분을 떼어 온 듯한 느낌도 든다. 그곳과 차이가 있다면 여긴 사암층 바로 옆으로 파도가 철썩인다는 점. 암벽의 색깔은 밝은 회색, 짙은 갈색, 베이지색 등으로 알록달록해서 용머리해안의 신비한 맛을 더해준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바다에 접해 있어서 좋은 점도 있지만 바닷바람이 거세기도 하고, 파도가 심한 날엔 입장이 제한되니 미리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외에도 협재, 함덕, 곽지해수욕장 등의 해변이나 섭지코지, 성산일출봉 등 바다와 맞닿아 있는 명소에서도 겨울 제주 바다의 정취를 맛볼 수 있다.
억새 - 억새의 바다에서 하루종일 헤엄치기
겨울 제주가 뽐내는 또 하나의 매력 포인트는 바로 억새다. 제주도에서 억새를 만나기 좋은 곳으로는 동쪽의 산굼부리, 서쪽의 새별오름이 유명하다. 사실 산굼부리는 백록담보다도 더 큰 분화구가 있어 관광,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곳이지만 사람들에겐 억새 명소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잘 정비된 길을 산책하듯이 걸으면 여길 봐도 억새, 저길 봐도 억새다. 길에 난 울타리 안쪽으로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억새들이 바람에 출렁거린다. 가까이서 보면 억새의 끝부분은 마치 머리칼처럼 부드럽게 휘날린다. 다른 오름(측화산)과 달리 6000원이란 입장료가 있긴 하지만 산굼부리는 그 가격이 전혀 아깝지 않은 억새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또 하나의 억새 핫플레이스인 새별오름은 멀리서 봐서는 야트막한 언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보면 그 언덕 전체가 억새로 뒤덮여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오름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산굼부리처럼 잘 포장된 게 아니고 그저 사람이 많이 지나다니면서 생긴 길이다.
억새를 구경한다기보단 억새밭에 파묻히는 느낌으로 새별오름을 돌아다니다 보면 ‘억아일체(억새+물아일체)’를 느낀다. 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억새의 빛깔은 수시로 달라지고, 억새밭은 하나의 큰 파도처럼 바람에 출렁인다. 산굼부리가 억새를 보기 좋은 곳이라면, 새별오름은 억새에 빠지기 좋은 곳이다.
/스냅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