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책임 회피 급급…정부-한전 이사회 누진제 개편 ‘핑퐁 게임’

by김형욱 기자
2019.06.24 00:00:00

한전 이사회, 여름철 가정 누진제부담 완화 결정 ''보류''
한전에 비용 부담 떠넘긴 정부…한전은 무책임한 거부
올 여름 적용되겠지만…전력시장 왜곡 해소 과제 남아

지난 6월11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주택용 전기요금 개편 공청회에서 한 참석자가 전기요금 누진제 민간 TF의 누진제 개편안에 반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뉴스1 제공
[세종=이데일리 김형욱 기자] 여름철 가정 전기요금 인하를 두고 정부와 한국전력(015760)(한전)이 ‘핑퐁 게임’을 벌이고 있다. 두 주체 모두 소비자인 국민들이 겪을 혼란을 걱정하기 보다는 당장 본인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려는 데만 급급하다는 점에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전 이사회는 지난 21일 민관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 태스크포스(누진제TF)의 최종 권고안에 따른 전기요금 약관 개정안 의결을 보류했다. 정부는 지난해 누진제에 따른 ‘전기요금 폭탄’에 대한 대중의 불만을 줄이고자 누진제TF를 꾸렸다.

누진제TF는 이에 에어컨 등 전기 사용이 많은 7~8월에 한해 누진 구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폭염 때 1629만가구가 평균 월 1만142원의 요금할인 혜택을 볼 수 있는 안을 확정해 한전에 제시했다. 그러나 한전 이사회의 이번 결정 보류로 일주일 남은 7월부터 이 같은 전기요금 할인을 적용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게 됐다.

예고된 갈등이다. 정부는 여론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국 뉴욕 증시 상장기업인 한전에 요금 인하를 종용하고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겼다.

일부 재정지원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으나 구체적 내용은 없었다. 한전은 이번 개편안이 통과되면 평년 기준 2536억원, 폭염 땐 2847억원의 비용을 매년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여 있다.

한전은 지난해에도 정부의 한시 폭염 대책 시행으로 발생한 요금 손실 3587억원을 고스란히 떠안았다. 당시 정부에서는 한전이 떠안게 될 손실액 보전 대책을 세웠으나 국회에서 전액 삭감됐다. 결국 예비비를 활용해 353억원 보전해 주는데 그쳤다.

이번 개편안 역시 상장사로서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한전 입장에서는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다.

한전은 이 가운데 올 1분기 역대 최대인 6299억원의 적자(연결기준)를 기록했다. 한전 주주들은 한전이 정부의 요금 억제 정책으로 이미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전기를 공급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한전 소액주주들은 한전 경영진을 상대로 한 직무유기와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예고하고 있다.



정부는 이런 상황에도 한전의 부담을 덜어줄 실효성 있는 카드를 내놓지 못했다. 전기요금 인하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생색을 내는 데 그쳤다는 비난을 두려워한 때문으로 보인다.

한전 이사회의 결정 보류도 무책임한 결정임은 마찬가지이다. 이번 보류 결정은 소액주주의 반발을 의식한 측면이 강하다. 버류 결정에 앞장 선 사외이사들이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의 불합리성 보다는 배임에 따른 손해배상소송을 더 걱정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한전 이사회는 김종갑 한전 사장 등 상임이사 7명과 김태유 이사회 의장(서울대 명예교수)등 사외이사 8명 등 총 15명이다. 과반 찬성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사내이사 전원과 사외이사 1명만 찬성해도 누진제 개편안 통과가 가능하다.

한전을 바라보는 일반 국민의 시선은 곱지 않다. 한전이 수조원씩 흑자를 낼 때도 별다른 혜택은 없었다. 수년 전부터 여름 폭염때마다 등장하는 누진제 폭탄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컸지만 자체적으로 해결책을 내놓기 보다는 정부만 바라봤다.

국내 독점 전력 공급 사업자로서 합당한 적자 보전을 요구하려면 일찌감치 대중에게 그 필요성을 설득하고 지지를 얻기 위한 노력을 했어야 한다. 한전은 이번 개편안 논의가 진행된 이후에야 일반 고객이 예상 전기요금 부과액을 예측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를 시작했다.

우여곡절을 겪고 있으나 결국은 이번 누진제 개편안은 올 여름부터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한전 이사회도 국민적 관심이 큰 이번 개편안을 계속 거부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당장 이번주 초 임시이사회에서 통과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누진제 개편 일정이 늦어지더라도 정부는 지난해처럼 소급 적용하는 방식으로 요금 감면 혜택을 부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 개편 논의 과정에서 정부가 주도하고 한전이 독점한 전력 시장의 문제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누진제TF 위원 대다수의 제언처럼 정부와 한전은 눈 앞의 문제를 해결하는데만 급급할 게 아니라 긴 안목으로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전력 시장을 만들고 고객이 납득할 수 있는 새 요금체계를 제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