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호 30년 전 '우리별 1호'가 있었다 [그해 오늘]

by김혜선 기자
2023.08.11 00:00:05

[이데일리 김혜선 기자] 1992년 8월 11일. 남아메리카 프랑스령의 기아나의 쿠루 우주발사장에서 가로 35.2㎝, 세로 35.6㎝, 높이 67㎝의 작은 상자가 카운트다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작은 상자는 한국 최초의 국적 인공위성인 ‘우리별 1호’로 한국의 항공우주 기술의 시작점 그 자체였다.

우리별 1호 발사 사진, (사진=국가기록원)
우리별 1호의 초읽기는 전 국민이 TV 앞에서 응원하는 축제의 장이 됐다. 발사 5초 전 발사대가 분리되고, 로켓의 엔진 점화와 1, 2, 3단계 로켓 분화까지 걸린 시간은 약 19분이 걸렸다. 발사 23분이 넘어서자 우리별 1호가 안정적으로 지구 상공 1300㎞ 궤도에 올라 임무를 시작했다.

우리별 1호는 처음 계획한 5년의 임무기간을 무사히 완수하고, 7년을 더 지상과 교신하다 2004년 연결이 끊겼다. 지금도 우리별 1호는 초속 7㎞로 우리 머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인공위성연구소는 우리별 1호를 한국형 발사체를 통해 다시 지구로 수거하는 ‘지구 귀한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우리별 1호는 우리나라 자체 기술로 만들어진 위성이 아니다. KAIST 인공위성연구소 소속의 청년 연구진들은 지난 1989년 해외 우주기술 선진 대학인 영국 서리 대학에 파견돼 위성 제작에 필요한 지식을 배웠다. 당시 최순달(1931~2014) 교수는 영국으로 떠나는 KAIST 학부 4학년생들에 “성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마라”는 특명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별 1호 발사 당시 연구진들. (사진=국가기록원)
이후 서리대의 도움을 받아 우리별 1호를 탄생시킨 연구진은 단 1년 만인 1993년 9월 26일 자체 기술만으로 우리별 2호 발사에 성공했다. 6년 뒤인 1999년 5월 26일에도 우리별 3호가 다시 우주로 날아올랐다.

이후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은 우리별 시리즈의 경험을 바탕으로 과학기술위성을 쏘아 올리며 소형위성 기술을 최적화했다. 이를 통해 한국은 국제적 수준의 천문학 관측이 가능해졌고, 무게도 100kg 이상 나가는 차세대소형위성을 개발해 발사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이후 1미터급 해상도를 관측할 수 있는 아리랑 2호, 한국 최초의 민군겸용 통신위성 무궁화 5호까지 차근차근 기술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항공우주기술의 핵심은 지구에서 우주 밖까지 안정적으로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우주발사체’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우주발사체를 만들기 위해 나로호 프로젝트를 시작했지만, 나로호는 1차 발사와 2차 발사 모두 실패했다. 2013년에 들어서는 나로호의 3차 발사를 성공해 한국 최초의 우주발사체가 됐다. 다만 나로호는 러시아 안가라 로켓을 1단으로 사용해 독자적으로 발사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이 자력으로 우주발사체와 인공위성을 제작하고 발사할 수 있는 ‘스페이스 클럽’에 들어가게 된 것은 지난해 6월 21일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누리호 발사에 성공하면서부터다. 누리호 역시 1차 발사에 실패하고 여러 차례 발사를 연기하면서 숙고한 끝에 우주 비행에 성공했다. 차근차근 항공우주기술을 개발해온 한국은 무게 48.6㎏의 우리별 1호에서 1.48t급 위성을 쏘아 올릴 수 있는 우주 강국이 됐다. 스페이스 클럽에 입성한 나라는 11개 국가로, 한국을 포함해 1t 이상 위성을 탑재할 수 있는 기술을 가진 국가는 7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