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심영주 기자
2021.04.19 00:30:50
'정보 불평등=사회문제'로 인식...쉬운 정보 전달 위해 시작
느린학습자 이해하려 특수학교에서 생활하기도
학습자가 보이는 가장 큰 변화는 '대화'
경계선지능에 대한 맞춤형 지원 이뤄져야
“처음에 굉장히 큰 뜻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예요. 사회에 작은 조약돌이라도 던져보고자 개인적인 활동으로 책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느린 학습자들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함의영 피치마켓 대표의 말이다.
느린 학습자는 장애인도 아니고 비장애인도 아닌 소위 ‘경계선지능’을 가진 이들을 설명하는 말이다. 이들은 표준화 한 지능 검사에서 지능지수(IQ)가 70~85 사이에 속한다. 보통 IQ가 85 이상이면 일반인으로 70 이하면 지적장애로 각각 분류한다.
경계선지능을 가진 이들은 언뜻 보면 기본적인 의사소통과 생활에는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상황 판단이나 대처 능력이 부족하다. 집중력과 문해력이 낮아 긴 글을 읽기 어려워하는 모습 등을 보이기도 한다. 이에 종종 학습 부진아로 낙인 찍힌다.
작은 관심에서 시작한 일
최근 서울 강남구에 있는 피치마켓 본사에서 만난 함 대표는 우연한 기회에 느린 학습자에 대해 알게 됐다고 전했다.
그는 유엔환경계획(UNEP) 한국위원회에서 기획협력팀장으로 일했다. 처음엔 경계선지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정보의 불평등이 사회 문제라 생각했고 그동안 정보 습득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들에게 정보를 쉽게 전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책을 만들게 됐다고 전했다. 특히 성인이 돼서도 아동용 동화책을 반복해서 읽고 있는 발달장애인들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함 대표는 “사실 쉽다 어렵다의 기준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떤 기준을 세울 수 없었다"며 "처음에는 발달장애인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책을 만들려고 했다”고 말했다.
발달장애인들을 위한 책을 제작하고 난 후에는 특수학급에 가서 독서활동을 하다 장애등급이 없는 경계선지능 청소년들을 여럿 보게 됐다. 이후 발달장애만으로 하던 사업 대상을 경계선지능까지 확장하게 됐다.
그는 “장애등급이 있어도 문해력이 높은 경우도 있지만 경계선지능이어도 발당장애인보다 문해력이 낮아 독서를 더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해 없이 시작한 사업...몸으로 부딪치며 극복해
막상 사업에 뛰어들고 보니 부족한 점 투성이었다. 책을 인쇄하는 곳조차 알지 못했다. 무작정 대학교 앞 복사집에 원고를 가져갔다. 그때 처음 편집이란 것을 알게 됐고 출판은 인쇄업체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장뿐만 아니라 대상자에 대한 이해도 부족했다.
출판사에 보냈던 원고는 시장성이 없다는 이유로 출판의 기회조차 잡지 못했다. 어렵사리 출간했던 서적은 그야말로 폭망했다. 책의 대상자인 느린학습자들이 읽기엔 어려웠던 탓이었다.
함 대표는 “자괴감은 물론 사업 지속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던 시기”라고 전했다.
함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다. 특수학교에 무작정 찾아가 2학기 정도 수업을 듣게 해달라 부탁했다. 1년 정도 그곳에서 지내면서 느린학습자들이 갖는 유머코드와 집중 분야 등을 파악했다.
그는 “학생들이 매번 글쓰기 숙제를 해왔는데 그걸 다 따라 쓰면서 학생들이 구두로 쓰는 단어와 어순이 글에서는 다르게 나타나는 점을 파악했다”고 설명했다.
당시에는 200편이 넘는 논문도 읽었다. 함 대표는 “학생들과 생활하면서 그들을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이 이해하기) 쉬운 글을 쓰는데 필요한 요소들이 무엇인지는 체득했다”고 덧붙였다.
그렇게 약 3년 정도를 민간단체로 활동하다 본격적인 사업을 위해 법인도 설립하게 됐다.
"느린학습자들의 대화능력 키우는게 가장 큰 목표"
함 대표의 가장 큰 사업 목표는 느린학습자들이 정보를 습득해 타인과 원활하게 대화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그는 "책을 읽고 그에 대한 지식이 쌓이는 것도 중요하다"면서도 "그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타인과의 원활한 대화"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치마켓에서 슬로건처럼 삼는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당시 42세였던 첫번째 독자가 40년만에 처음 책을 읽고 부모님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봤다며 감사 편지를 보내온 일이다.
함 대표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은 많은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며 "평소 나눴던 대화가 책을 통해 좀 더 다른 차원에서 가능해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이슈가 한창일 땐 찬반 의견을 정리해 번안한 글을 보고 평소 보지 않던 뉴스까지 챙겨보며 아버지와 열띤 토론을 벌인 친구도 있었다"며 "그걸 지켜보던 어머니가 울면서 연락한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문학작품을 번안할 땐 필독서나 교과서에 실린 작품을 위주로 선택하는 것도 그래서다.
함 대표는 “정서가 발달하는 청소년 시기에 교과서를 통해 많은 문학 작품을 접하면서 그 안에서 어떤 정서나 공감대를 나누게 된다”며 “느린학습자들이 학년기 이후에 다른 사람들을 만났을 때 기본적인 정서를 공유하고 나아가 작품에 대한 이야기도 할 수 있도록 신경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느린학습자도 독서에 흥미 느낄 수 있어...학습자들 변화 볼 때 감동
학습자들 부모는 “신기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한다. 책이라면 질색하던 아이였는데 독서 활동에 빠지지 않고 항상 참여하는 모습이 낯설다는 반응이다. 함 대표도 그런 학습자들이 인상 깊다.
함 대표는 “꽤 오래전 책 읽기만 시작하면 항상 도망가기 바빴던 친구가 있었다”면서 “그랬던 친구가 일산에서 서울 강남까지 매주 홀로 방문해 독서활동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면서 “내가 교육현장에서 물러나 한동안 현장 방문을 못했다"며 "2년이 흘러 방문한 현장에서 혼자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있는 그 친구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아 사진까지 찍어뒀다”고 흐뭇해했다.
피치마켓에서 3년간 독서 활동을 하다 검정고시에 도전한 학습자도 있다.
함 대표는 “집중력도 낮고 글을 이해하는 것을 굉장히 힘들어하던 친구였는데 매주 독서 활동을 하면서 글에 대한 거부감이 낮아졌다”며 “대안학교에 진학했을 땐 다른 친구들이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을 보고 본인도 해보겠다고 하더라. 조금 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검정고시 합격까지 했다”고 전했다.
서울시 공모에 '시끄러운 도서관' 제안도
서울시가 추진한 ‘시끄러운 도서관’도 함 대표의 일련의 경험에서 비롯된 아이디어다. 시끄러운 도서관은 정숙을 요했던 기존의 도서관과 달리 낭독과 대화가 자유롭게 이뤄지는 도서관이다.
함 대표는 “처음엔 독서 습관이 없는 이들에게 어떻게 책에 대한 흥미를 줄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다”며 “그러던 중 독서를 개인화 활동으로 봤을 때 굉장히 강한 동기부여가 없으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는 한 교수님의 말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그는 “동기부여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독서가 습관이 되게 하려면 오직 재미 뿐이라 생각했다”며 “느린학습자들이 독서가 개인적인 활동이 아니라 사회화 활동으로 인식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고 말했다. 즉 학습자들이 같은 속도로 책을 낭독하고 토론을 할 때 독서를 함께 하는 활동으로 인식해 흥미를 붙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시끄러운 도서관이라는 별도의 공간이 생기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실천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일반 도서관의 유료 공간을 이용했는데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소음에 모두가 난감한 상황이 되었던 것.
그렇다고 학습자들에게 묵독을 강요하자니 독서가 개인 활동이 됐다. 이에 여러 번 공간을 옮기다 결국 전용 공간까지 만들게 됐다.
함 대표는 그러면서 “발달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같은 말 자체가 어떤 이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며 “대상자에 대한 언급 없이 시끄러운 걸 받아줄 수 있는 공간이란 걸 알리기 위해 이름을 지었다. 조용한 사람이 그 공간에서 애써 시끄러워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시끄러울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도서관 이름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우리는 안경 정도의 역할...대상자에 대한 지원 이뤄져야"
그는 인터뷰 내내 느린학습자들의 변화에 피치마켓이 기여한 점은 없다고 겸손해했다.
그는 “아무래도 느린학습자들을 위한 책을 출판하다 보니 치료책이라고 홍보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많이 온다"며 "하지만 이들이 치료의 대상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늘 들었다. 감히 이들을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피치마켓이 하는 일을 ‘안경’에 비유했다.
함 대표는 “느린학습자들은 시력이 좋지 않은 사람들 정도로 생각하면 맞을 듯 싶다”며 “안경이 치료제는 아니지 않나.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있는 사람들에게 적절한 무언가를 해주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은 안경 정도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표현했다.
경계선지능인들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도 언급했다.
그는 "경계선지능인들의 학년기 이후 삶에 대해선 민간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렵다"며 "기본적인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아 발달장애인 의무채용처럼 경계선지능인들에 대한 제도적인 지원도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성인들 같은 경우엔 본인이 경계선지능인지 모르는 경우도 많다. 청소년도 특수학교 뿐 아니라 일반학급에 있는 경계선지능인들도 많은데 대상자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라며 "대상자를 찾지 못하면 지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맞춤형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을 찾는 것이 첫 시작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스냅타임 심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