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현인의 발길 따라 오래 걷는 즐거움

by최은영 기자
2019.04.01 05:00:00

[김병일 도산서원 원장·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지난 칼럼(‘퇴계의 포용, 봉은사의 너그러움’)에서 퇴계 선생의 마지막 귀향 450주년 재현 행사 계획을 출발지인 봉은사를 중심으로 소개한 바 있다. 오는 9일부터 21일까지 13일간 그 옛날 그분의 일정과 코스를 재현단이 따라간다. 서울에서 안동 도산서원까지 320km의 거리다. 선생은 배와 말을 타고 갔으나 재현단은 충주댐 수몰지역 70km

를 제외한 250km를 걸어간다. 강연행사가 있는 첫날과 마지막 날을 제외하고 11일 동안 오전 8시부터 20~30km씩 온종일 걷는 일정이다.

그간 많은 분들이 이 행사가 큰 스승 퇴계의 삶과 정신을 여러 날 동안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니 어떤 책이나 강연보다 효과적이라며 격려해주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염려는 빼놓지 않았다. 그 먼 거리를 어떻게 열흘 넘게 걸어가며, 게다가 참여자들이 60~70대가 주류인데 정말 괜찮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한창 때를 한참이나 지난 사람들이 하루 8~9시간씩 오랫동안 걷는다는 계획에 걱정이 따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솔직히 필자도 지난 해 말까지 반신반의하였다. 이 때문에 행사의 성공을 위해서는 구상을 처음 꺼낸 필자가 먼저 그 가능성을 시험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사전 답사를 겸해 금년 1월부터 매 주말 이틀 동안 50~60km를 걸었다. 첫날 기억이 또렷하다. 소한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고 찌뿌듯했다. 봉은사에서 팔당까지 30km를 걷는다는 것이 영 자신이 없었다. 중도에 탈락할까 걱정되어 차량을 가까이 따라오게 하고 아주 천천히 걸어갔다. 2시간이 흘러 광나루에 도착하니 컨디션이 조금 나아졌다. 점심을 먹고 한강변을 이어 걷다보니 몸이 더욱 가벼워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목적지인 팔당에 도착하여 가진 저녁 자리에서 함께 걸어온 4명이 심신이 훨씬 좋아졌다고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소문이 퍼지자 사전 답사 지망자가 부쩍 늘어났다. 그리하여 2월초 마지막 코스에는 무려 17명이나 참여하였다. 걸을수록 좋다고 몸이 말하고, 여기에 마음까지 산뜻해지더라는 모든 참여자들의 한결같은 입소문의 결과였다. 이 열기에 힘입어 15명 규모의 유림과 학자 중심으로 본 행사 재현단이 일찌감치 구성되어 출발을 앞두고 있다.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왜 이렇게 참여하려 할까? 실제 오래 걸어보니 아주 좋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랜 세월 걸어 다녔다. 차타기가 일상화 된 현대인들의 질병과 피로감의 근본원인은 걷지 않는 생활습관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오래 움직이니 몸이 좋다고 저절로 반응하는 것이다.



시간과 다투는 현대인들이 오래 걷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평일에 조금씩 걷고 주말에는 종일 걸어보는 것을 권한다. 그렇지만 현대인들은 살아가며 꽤 바쁘게 움직인다. 빠른 속도로 힘차게 걸어야 운동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 종일 그 속도로 걸어갈 수는 없다. 평소보다 반드시 천천히 걸어야 한다. 하루 종일 걸어갈 수 있다고 느끼는 속도로 걸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부상이나 큰 탈 없이 오래 걸어 갈 수가 있지 않겠는가.

재현단의 참여 열기가 뜨거운 이유 가운데 또 하나는 걷기가 마음도 가라앉히고 생각도 정리되도록 유도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번민과 갈등이 있거나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웅크리고 고민하지만 말고 넓고 드높은 자연 속의 길을 천천히 걸으면 정신적으로 매우 평온해지는 것을 느낀다.

특히 이 길이 퇴계 선생과 같은 현인(賢人)이 걸어갔던 길이라고 하면 감회는 배가된다. 그저 그런 길이 아니라 역사 속 위대한 스승의 발길이 지났던 길을 내가 걷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럴 때 걷는 이는 자연스레 구도자(求道者)가 되고 동반자는 도반(道伴)이 된다.

최근 언론을 통해 귀향길 재현행사가 차츰 알려지면서 일반인들의 참여문의가 잇따르고 있다. 매우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퇴계 선생이 걸어갔던 바로 그 길 위에서 그분의 삶을 생각하며 많은 이들과 함께 하고 싶다. 몸도 가볍고 마음도 상쾌해졌던 소중한 경험을 이번 재현행사에서 나누고 싶다. 그 이후에도 좀 더 많은 분들이 선생의 귀향길을 걸어가며 품격 있는 체험을 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