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훈길의뒷담화]입맛 쓴 소득공제 폐지 논란…970만 직장인 민심 못읽은 文정부
by최훈길 기자
2019.03.18 01:00:00
홍남기 납세자의 날 축사서 “소득공제 축소 검토”
소득공제 축소·폐지시 968만명 세부담↑..서민증세 불가피
기재부, 현실 외면한채 과세원칙 강조하다 논란 야기
국민 눈높이서 정책 바라보는 3자적 시각 키워야 논란 줄어
[세종=이데일리 최훈길 기자] 신용카드 소득공제 개편이 축소·폐지 논란 끝에 결국 없던 일이 됐습니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 13일 신용카드 소득공제를 현행대로 유지하고 일몰(시한만료)을 2022년까지 3년간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확정되기까지 많은 직장인들의 울화통이 터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기획재정부 안팎 얘기를 종합해보면 결국 정책 당국자들이 소득공제를 줄여야 한다는 당위론에 빠져 민심을 못 읽은 탓으로 보입니다. 제대로 된 의견수렴도 없이 민감한 증세 사안을 툭 꺼내놓고 뒷수습을 못한 탓에 대통령 지지율만 깎아 먹었습니다.
시작은 한국조세재정연구원(원장 김유찬)이었습니다. 조세연은 ‘소득주도성장과 공정경제를 위한 소득세 공제체계 개편방향’이란 주제로 지난달 20일 토론회를 열 예정이었습니다. 조세연은 이때 신용카드 등 각종 소득공제 개편 방안을 공개하기로 했습니다.
토론회는 갑자기 취소됐습니다. 조세연은 토론회 하루 전에 메일로 “내부사정으로 인해 잠정 연기됐다”고 밝혔습니다.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소득공제가 폐지 또는 축소하면 소비심리가 위축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제활력 제고’를 경제 정책 핵심으로 내건 기재부가 소득공제 개편을 연기하려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게다가 수백만명의 이해관계가 직결된 세법 개정을 공청회나 토론회 한번 없이 강행하는 건 상식에 맞지도 않고요.
그러나 불과 보름도 안 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이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안’을 꺼내 들었습니다.
홍 부총리는 지난 4일 코엑스에서 열린 ‘제53회 납세자의 날’ 기념식 축사에서 “신용카드 소득공제와 같이 도입 취지가 어느 정도 이뤄진 제도에 대해서는 축소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도입됐습니다. 도입 취지는 △자영업자의 과표 양성화 △근로소득자의 세 부담 완화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자영업자 매출은 현금거래가 대부분이어서 종합소득세와 부가가치세 탈루가 일상적으로 이뤄졌습니다. 하지만 신용카드로 결제하면 매출규모가 백일하에 드러나기 때문에 탈루가 불가능해집니다.
조세연이 기재부에 제출한 ‘신용카드 등 사용금액에 대한 소득공제 및 세액공제’ 보고서에 따르면, 자영업자 소득파악률은 2010년 62%에서 2016년 88%까지 높아졌습니다. 홍 부총리 표현대로 ‘도입 취지기 어느 정도 이뤄진’ 셈입니다.
조세연은 보고서를 통해 “제도의 축소 또는 폐지하는 방향으로 출구전략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습니다. 조세연이 연말정산 경험이 3번 이상 있는 직장인 2500명을 대상을 한 설문조사에서 ‘신용카드 공제율 축소·폐지’에 의견을 묻는 질문에 예상보다 높은 36.8%가 찬성했다는 결과도 덧붙였습니다.
기재부는 신용카드 소득공제 일몰 연장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집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일반화돼 오히려 현금만 받으면 손님이 끊기는 상황에서 무리하게 소득공제를 제공할 이유가 없어졌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신용카드 사용이 정착하면서 소득공제 혜택 규모가 1조8444억원(2016년 기준 조세지출액)에 달한 것도 부담거리였죠. 그만큼 세금이 덜 걷혔다는 얘기니까요. 게다가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소득수준이 높을수록 혜택이 커지는 문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 신용카드, 체크카드, 현금영수증 등으로 소득공제를 받는 근로자가 967만7324명에 달했다. 이 중 연소득 6000만원 이하 근로자가 826만7198명(85%)으로 대부분이었다. 신용카드 등의 소득공제를 축소·폐지하면 이들 근로자들의 세 부담이 늘어나게 된다. 2017년 기준.[출처=국세청 2018 국세통계연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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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부총리가 소득공제 축소를 검토하겠다고 발언한 것도 이 같은 배경 때문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정부 예상과 달리, 그리고 대다수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반발이 거셌습니다. 심지어 사사건건 기재부와 각을 세워온 한국납세자연맹은 홍 부총리 발언 다음 날인 지난 5일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 반대’ 서명운동에 돌입했습니다. 김선택 납세자연맹 회장은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는 서민과 중산층 근로자의 삶을 더 힘들게 할 것”이라고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신용카드 소득공제 축소는 ‘서민·중산층 증세’라는 비난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습니다. 국세청 ‘2018 국세통계연보’에 따르면 신용카드 등의 소득공제를 받은 국민은 967만7324명(이하 2017년 기준)에 달합니다. 연말정산을 신고한 1800만5534명 중 절반(54%)에 달하는 근로자가 이 공제 혜택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소득별로 보면 신용카드 등의 소득공제는 연봉 6000만원 이하 근로자(826만7198명)가 대부분입니다.
△소득 1000만원 이하는 93만736명 △1000만원 초과~2000만원 이하는 246만8604명 △2000만원 초과~4000만원 이하는 330만440명 △4000만원 초과~6000만원 이하는 156만7418명이었습니다.
조세연 보고서에 따르면 신용카드 등의 소득공제가 완전히 폐지되면 4000만원 초과 6000만원 이하 근로자는 연간 28만원 가량 세 부담이 늘어나게 됩니다. 대부분 문재인 정부 주요 지지층인 30~40대 직장인들이죠. 총선을 앞둔 여당 발등에 불어 떨어질만 했습니다.
중장기적으로 증세는 필요해 보입니다. 복지 선진국들에 비해 아직 우리나라 과세부담은 높은 수준이 아닙니다. 하지만 떠들썩하게 세금 올리겠다고 하면(공제 축소도 결국은 증세입니다) 누구나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현 정부가 특히 강조하는 ‘공론화’ 과정을 누락한 건 아쉬운 대목입니다.
장기적인 로드맵을 제시한 뒤, 공청회·토론회를 거쳐 투명하게 진행했어야 했습니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둔 만큼 세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할 수 있는지 정무적 판단도 필요했습니다. 시행착오는 누구나 겪습니다. 홍 부총리가 정책 방향을 결정할 때 이 정책이 국민들 눈높이에 맞는지 한 번만 더 고민하고 의견을 구하는 과정을 거쳤으면 합니다.
|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김유찬 한국조세재정연구원 원장.[연합뉴스, 조세재정연구원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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