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불 끌까'…등화관제 추억[그해 오늘]

by전재욱 기자
2022.11.15 00:03:00

1977년 11월15일 수도 서울서 등화관제 훈련 첫 실시
보름여 뒤 민관군 합동 대규모로 야간 `빛 통제`…''불꺼!''
적공습 대비 목적이었지만 일상불편 지적에 13년만에 폐지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1977년 12월2일 밤 9시40분.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서울 시내가 어둠에 잠겼다. 거리를 밝히던 등에 불이 나가고 도로를 달리던 자동차 시동이 꺼졌다. 시청을 비롯해 시내 주요 건물도 불이 꺼졌다. 전기를 공급하는 한국전력공사 건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물며 주택가에 불이 들어올 리 만무했다. 명동 유흥가의 네온사인은 고장이 난 듯싶었고, 식당은 촛불을 켜고 손님을 받았다.

86을지훈련 당시 등화관제로 불꺼진 시내 모습.(사진=KTV유튜브)
그해 처음 서울에서 실시한 등화관제(燈火管制) 훈련 풍경이었다. 정부가 그해 11월15일 서울에서 예행 훈련하고 보름여 만에 민관군 합동으로 대규모 민방위 훈련을 시행한 것이다. 서울에서 인위로 등화를 통제하는 훈련이 이뤄진 것은 휴전 이후 처음이었다. 훈련은 10시50분까지 1시간10분 동안 이어졌다.

훈련은 시민의 일상을 바꾸어놓았다. 이동권 제약이 가장 컸다. 70분간 이어진 훈련 동안 차량은 물론이고 보행으로도 이동이 통제됐다. 퇴근 인파가 몰리면 가뜩이나 심한 서울 교통난이 악화할까 우려됐다. 정부는 통행금지 시간을 새벽 1시까지 늘려 인파를 분산하려고 했다. 이를 예상하고 기업과 관공서는 야근을 줄이거나 없앴고, 직장인은 서둘러 집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자 이럴 바에 아예 하루 쉬자는 식당도 다수였다. 주택에서는 암막 커튼을 치고 커튼이 없으면 불을 꺼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민방위 대원이 집안으로 쳐들어올지 몰랐다. 이런 이유에서 커튼 집이 때아닌 호황을 맞았다.

대체 불을 왜 끄라는 것인가 싶다. 등화관제는 적의 야간공습에 대비하는 훈련 일환이다. 적기(敵機)가 타격점을 찾지 못하도록 빛을 지우는 것이다. 대상은 건축물(주택·건물 등), 옥외등(가로등·광고판 등), 이동수단(차량·선박·항공기 등)을 총망라한다. 방법은 등화를 가리거나(차광), 여의치 않으면 꺼버리는(소등·소광) 것이다. 민방위기본법 시행령 48조(등화관제)가 근거다. 매달 15일 민방위 날이나 정부가 정한 날에 하는 민방위 훈련에서 지자체장은 등화관제를 명령할 수 있다.



사문화돼 있던 등화관제가 부상한 시기는 1976년이었다.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한 그해였다. 북한군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미군 2명을 살해하면서 남북관계가 경색하기 시작했다. 북한이 야간 등화관제 훈련을 하는 사실이 알려졌다. 유사시를 대비하는 움직임이었다. 군사정권은 민간의 피해를 예방하고자 민방위 훈련을 강화하기로 했다. 주간에만 하던 민방위 훈령이 야간까지 확대되면서 등화관제가 등장한 것이다.

86을지훈련 당시 등화관제로 시동을 끈 버스에서 시민이 내려 대피소로 이동하는 모습.(사진=KTV유튜브)
이런 시대적 배경에서 첫 등화관제 훈련이 민관군 합동으로 1977년 12월 수도 서울에서 시작했다. 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일이 중요한 가치였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시민이 일상을 양보해야 했다. 불 꺼진 도시는 멈출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시간 넘게 멈춘 서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교통난, 경제적 손실 등 치러야 할 비용이 한둘이 아니었다.

훈련이 훈련을 위한 훈련으로 변색하기도 했다. 100% 소등 목표를 달성하고자 일부러 정전을 일으키는 아파트 단지가 나타났다. 민방위 사태에서는 라디오 방송을 들으면서 상황을 주시해야 하는데, 정전이 발생하면서 라디오를 켜지 못하는 웃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불 꺼진 집에서 촛불을 켜느라 화재 위험이 커져, 되레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는다는 지적도 있었다. 완장 찬 민방위 대원의 고압적 태도도 시민 불만을 키웠다. 등화관제가 반가운 이는 군사정권과 커튼 집뿐이라는 비아냥도 돌았다.

전국 단위의 등화관제 훈련은 1990년 11월15일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서울에서 첫 훈련을 한 지 13년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