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우리도 손정의처럼”…한국판 비전펀드 시동 걸리나
by김성훈 기자
2022.04.29 04:50:00
대기업 해외 투자·외부 출자 허용 촉각
"한국판 비전펀드 출범 속도내야" 의지
공격적 투자와 펀딩이 글로벌 스탠다드
산적한 장애물 여전…새정부 의지 관건
[이데일리 김성훈 기자] “투자 장벽을 완전히 허물어달라”
새 정부 취임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본시장과 재계 안팎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요점은 간단하다.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일본 소프트뱅크의 ‘비전펀드(VISION FUND)’처럼 국내 대기업들도 해외 투자와 외부 자금출자 전면 허용을 검토해달라는 것이다.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규제가 완화되는 분위기지만 이걸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평가다.
국내 대기업들도 글로벌 시장에서 화끈하게 투자하고 입지를 넓힐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는 것이다. 국내 벤처투자는 물론 해외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기업) 육성에도 국내 대기업이 나서야 한다는 게 재계 주장이다. 이른바 ‘한국판 비전펀드’ 출범을 위해 풀어야 할 과제 또한 적잖은 가운데 새 정부가 재계 메시지에 응할지가 관건이다.
국내도 비전펀드 만들 때 되지 않았나요?28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재계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대기업 해외 투자와 외부 자금출자 전면 허용 검토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지난해 말부터 일반지주회사도 기업형 벤처캐피털(CVC) 설립을 허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지분 100%의 자회사 형태여야 하는데다 차입 한도 또한 일반 벤처캐피탈(자기자본 800~1000%)에 한참 못 미치는 자기자본 200%로 제한돼 있어 갈증이 여전하다는 분석이다.
업계에 따르면 재계의 요청은 앞선 CVC 허용에서 한발 더 들어간 형태로 직접 펀딩(자금조성)을 주도하고 딜소싱(투자처 발굴) 등 해외 투자를 주도할 수 있는 펀드를 만들 수 있도록 길을 터달라는 게 핵심이다. 롤모델은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 비전펀드다. 일본 IT(정보통신) 기업인 소프트뱅크가 모태지만 127조원 규모 1호 펀드에 이어 137조원 규모의 2호 비전펀드를 굴리는 글로벌 투자자로서의 명성이 더 자자하다.
펀드 조성 과정에서 애플이나 마이크로소프트(MS), 사우디아라비아국부펀드 등의 출자를 이끌어내며 천문학적인 규모의 펀드를 조성했다. 지난해 미국 증시에 상장한 이머커스(전자상거래)기업 쿠팡과 야놀자 등 국내 시장 기반 유니콘에도 거액을 투자하면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올 들어서는 바이오 기업에 투자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미국 생명공학 전문 매체인 바이오센추리에 따르면 비전펀드2는 올해 1분기에만 8억900만달러(1조31억원) 투자를 집행했는데, 7곳의 바이오벤처기업에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총 16곳의 바이오벤처에 투자한 것과 비교하면 바이오벤처 투자에 속도를 올리며 선제 투자에 나섰다.
넘어야 할 장애물 산적…새 정부 의지가 관건국내 대기업 입장에서도 벌어지는 격차를 두고만 볼 수는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봤을 때 격차가 벌어지는 것은 막아야 하지 않느냐”라며 “새 정부가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고 새 기준을 만들기 위한 협의에 나서는 것으로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대선 이후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과 4차례나 만난 점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 회장은 지난 22일 부산상의 회관에서 진행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기원 대회’에서 “정부와 원팀으로 일심전력 다할 것”이라고 협력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등 각별한 관계 형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2일 오전 부산 부산진구 부산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계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기원 대회에 참석해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사진=인수위 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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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들은 대기업의 자본시장 참여가 이미 속도를 내고 있다면서도 자본시장 내 새로운 판이 깔리느냐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대기업 펀드 출자를 통해 해외 투자로 범위를 넓힐 수 있다는 계산에서다. 한 PEF 운용사 관계자는 “이미 기업들이 여러 방면으로 투자 범위를 넓히고 있지 않느냐”라며 “대기업이 투자를 주도하는 포지션이 주어진다면 전에 없던 그림이 나오긴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무르익는 기대감에도 넘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다. 대기업의 해외 투자나 자금 출자를 전면 허용할 경우 특정 대기업에 대한 특혜로 비춰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산분리(금융 자본과 산업 자본을 분리하기 위한 법률)원칙이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도 여전하다. 깐깐한 기준을 유지하며 조금씩 완화해온 기조를 하루 아침에 허물기 부담스럽다는 관측도 나온다. 더욱이 해당 제도를 악용한 기업들의 ‘해외 사금고화’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 또한 과제로 남아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당장 전면 허용으로 가기에는 넘어야 할 산이 너무 많다”면서도 “기준을 새로 정하고 현재 기준에 대해 재검토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보니 본격 논의를 시작하는 것 만으로도 유의미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