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대신 값싼 구리로..산화 원리 밝혀 ‘나노회로’ 개발 길 열었다
by강민구 기자
2022.03.17 02:00:00
정세영 교수팀, 구리 박막 단결정으로 구현
표면 거칠기 0.2 나노미터로 제어..산화 차단 확인
외산 고가 장비 대체할 박막성장장치도 개조
구리, 전기전도성·경제성 갖춰 산업계 전반 활용 기대
[이데일리 강민구 기자] 미국 뉴욕의 랜드마크인 자유의 여신상의 원래 색깔은 뭘까. 구리와 철을 섞어 만들었기 때문에 프랑스가 동상을 제작해 미국으로 보낼 때는 붉은빛의 금속색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구리와 철이 산화돼 지금처럼 청록색을 띈다. 이처럼 구리 산화는 규칙성이 없고, 제어할 수 없어 현대 과학으로 정복하지 못한 숙제였다.
정세영 부산대 교수팀이 김영민 성균관대 교수, 김성곤 미국 미시시피주립대 교수 연구팀과 함께 구리산화의 원리를 원자 수준에서 세계에서 처음으로 규명하고, 그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게재했다. 연구팀은 산소진입 경로를 알아내고, 산소가 스스로 산화를 막는 박막기술을 개발해 나노회로를 비롯한 산업 공정 전반에 활용할 길을 열었다.
| 정세영 부산대 교수.(사진=과학기술정보통신부) |
|
구리는 금보다 40% 우수한 전도체(전기가 잘 통하는 물질)이다. 하지만 산화라는 약점 때문에 초정밀 소재나 회로에 쓰지 못했다. 각종 전자기기 등에 쓰이는 소재가 소형화·집적화되면서 전기가 잘 통하는 소재가 필요하지만, 구리보다 비싸고 전도도가 구리보다 나쁜 금을 써야 했다.
일반적으로 물질 속 원자들이 규칙적으로 한쪽 방향으로 정렬돼 있으면 단결정이라고 한다. 다이아몬드나 루비처럼 투명한 보석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구리 박막을 단결정으로 만들게 되면 전기전도성을 높이고, 저항을 낮춰 전력소모를 줄일 수 있다. 전자들이 이동하면서 신호가 왜곡되거나 퍼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만 결함이 발생하기 때문에 구리 박막을 단결정으로 만들지 못했다.
구리 박막은 벽돌로 담을 쌓는 것처럼 원자를 하나씩 규칙적으로 쌓아 만드는데 이를 ‘표면 거칠기’라고 한다. 연구팀은 최고 수준이었던 1.5나노미터 수준의 거칠기를 0.2나노미터 수준으로 제어했고, 단원자층 수준의 초평탄 구리박막을 만들어 산화하지 않도록 했다. 2017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등에 연구자들이 구리를 초평탄면으로 만들 수 없다는 연구논문을 낼 정도로 어려웠던 주제를 해결했다.
연구팀이 1년 동안 공기 중에 노출된 구리박막을 관찰한 결과, 거칠기가 두 원자 층 이상이면 구리 내부로 산소 침투가 쉽게 이뤄져 산화가 발생했지만 완벽하게 평평한 면이거나 단원자층일때는 산소 침투가 이뤄지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해 상온에서 산화가 발생하지 않았다.
정세영 교수는 “초평탄 위에 앉은 산소이온들은 표면의 산소이온 점유도를 스스로 조절했다”며 “산화 저항력이 강하고, 표면에 모인 산소를 스스로 차단하는 ‘자기조절 산화 저항’ 성질도 나타냈다”고 설명했다.
| 구리 산화 모델. 원자계단 한층 수준의 초평탄면에서 산소가 침투하지 못하고, 원자계단 두층 이상에서 산소가 침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자료=과학기술정보통신부) |
|
연구팀은 연구 과정에서 자체 개발한 원자 스퍼터링 에피탁시(ASE) 장비를 이용했다. 금속 박막 분야에서는 MBE, PLD, ALD 등 외산 고가 장비를 쓰고 있는데 가격이 6분의 1 수준인 국산 장비를 이용해 경제적으로 원자 한층 수준의 초평탄 구리 박막을 만들었다.
이번 연구는 산업 전반에 사용되는 구리의 산화 원인을 정확히 밝혔고, 나노회로 등에 쓰는 금을 구리 박막으로 전면 교체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정세영 교수는 “금속 단결정 연구를 하는 그룹은 전 세계에서 우리가 유일하며, 해외 학회에서 (연구에 대한) 인정도 받고 있다”며 “구리 산화의 기원을 원자수준에서 규명한 사례로 변하지 않는 구리를 만들 가능성을 열었다”고 밝혔다.
앞으로 산업 현장에서 쓰기 위해서는 고온에서의 추가 공정 연구, 기존 제조 공정 라인의 변화 등이 필요할 전망이다. 정 교수는 “초평탄 박막을 구현해 접촉 저항을 줄이는 것은 산업계 초미의 관심사”라며 “이번에 개발한 구리박막은 결함이 없고, 산화되지 않기 때문에 산업계 전반에서 구리의 활용도를 높여 경제적인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힘줘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