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호박 빨간호박 찌그러진 호박…넝쿨째 굴러온 '쿠사마 세상'

by오현주 기자
2021.08.12 03:30:01

아트스페이스선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개막
어릴 적 집안 창고 속 호박에 매혹
강박·환각, 예술영감으로 승화시켜
'무한그물망' 원화 등 20여점 걸어
쿠사마 오마주한 국내 신진작가들
'초충도' '무제' '패턴' 등도 볼거리

서울 중구 순화동 KG타워 아트스페이스선이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전을 11일 개막했다. 쿠사마 정수를 집약한 20여점을 펼친 전시장에 한 관람객이 1988년에 제작한 ‘호박’(90.8×67.5㎝)을 감상하고 있다. 그물망 바깥으로 초록·빨강의 땡땡이 줄을 둘러친, 쿠사마의 수많은 회화 중에서도 드문 구성이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첫눈에 혹하게 돼 있다. 주위를 의식하지 않고 펑퍼짐하게 앉아 있는 노란 호박을 보면. 울퉁불퉁한 결 위에 크고 작은 까만 점이 총총히 박힌 후덕한 자태는 동양과 서양, 아이와 어른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에게 ‘호감’을 준다. 그러니 눈과 가슴에 박힐 수밖에. 게다가 말이다. 유난스럽게 존재감을 과시하지 않아도 어느 장소에서든 스스로 빛내는 법을 아는 그 점박이 호박들은 창조주인 작가를 참 많이 빼닮았다. 쿠사마 야요이(92) 말이다.

‘호박작가’ ‘땡땡이작가’로 불리는 쿠사마, 그이의 분신이라 할 작품들이 한꺼번에 나들이에 나섰다. 서울 중구 순화동 KG타워 아트스페이스선이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이란 타이틀로 연 특별전이다. 11일 개막한 전시는 한 달여간 쿠사마의 ‘정수’를 집약하는 평면·입체작품 20여점을 내건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것은 국내 컬렉터들이 소장한 작품으로 꾸린 이른바 ‘쿠사마컬렉션’이란 점이다. 끝없이 뻗쳐낸 창작의 ‘무한세계’는 말할 것도 없고, 전통 컬렉터에 더해 MZ세대의 예술적 취향까지 저격한 ‘쿠사마 파워’를 가늠할 수 있다는 거다.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전 전경. 쿠사마의 시그니처라 할 ‘노란’ 호박을 다양하게 변주한 1990년대 평면작품들이 나란히 걸렸다. 오른쪽은 조각 ‘노란 점박이 호박’(Yellow Dot Pumpkin·1992·20×10×30㎝). 나무상자 안에 노란 호박 반토막을 들여 마치 선물상자처럼 보인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덕분에 전시는 그이의 작품 중 대중이 가장 선호한다는 ‘호박 시리즈’를 넝쿨째 들였다. 호박을 색으로 문양으로 다양하게 틀어낸 1990년대 스크린프린트(실크스크린) 작품이 절반 이상이다. 가는 선을 듬성듬성 엮은 그물망 배경에 다채로운 모양과 색을 들인, 마치 그물에 걸린 호박인 듯한 작품들이 줄지어 걸렸다. 그 축은 역시 쿠사마의 시그니처라 할 ‘노란’ 호박. 그 곁에 함께한 붉고 파란 호박들은 ‘노랑’의 변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한 점, 1988년 제작한 ‘호박’(90.8×67.5㎝)은 국내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몸값을 한껏 끌어올리고 있는 또 다른 에디션으로 눈길을 끈다. 그물망 바깥으로 초록·빨강의 땡땡이 줄을 둘러친, 쿠사마의 수많은 회화 중에서도 드문 구성이다.

호박을 살짝 비켜가면 쿠사마를 비로소 경지에 오르게 한 ‘인피니트 네트’를 볼 수 있다. 흰색톤의 캔버스에 회색의 무수한 점을 찍어 완성한 아크릴원화 ‘화이트 네트’(2006·145.5×145.5㎝)다. 이외에도 역시 그물망 배경에 화병·과일박스 등을 앉힌, 2000년대 스크린프린트 5∼7점이 분위기를 바꾼다.



쿠사마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 줄기다. ‘인피니트 네트’라 칭하는 무한그물망 작업, ‘펌킨’으로 명명한 호박 작업이다. 두 갈래 모두 수없이 찍어댄 크고 작은 점, 동글동글한 물방울의 무한반복이 기본이다. 그것이 형체를 갖춰 ‘호박’이 되기도 하고, 그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무한그물망’이 되기도 했던 터. 일생에 걸쳐 쿠사마는 그 호박과 그물망을 변화·확장하는 진화를 거듭해왔다.

쿠사마 정수를 집약한 20여점을 펼친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전에서 한 관람객이 캔버스에 아크릴로 작업한 ‘화이트 네트’(2006·145.5×145.5㎝)를 바라보고 있다. 흰색톤의 캔버스에 회색의 무수한 점을 찍어 완성한 ‘인피니트 네트’ 연작 중 한 점이다. 그 왼쪽으로 스크린프린트 ‘호박’(1993·54×65㎝)이, 오른쪽으로 아크릴 원화 ‘호박’(2003·22×27.3㎝)이 보인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호박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 중반. 쿠사마가 17∼18세쯤 되던 때다. 당시 도매업을 하던 그이의 집안 창고에는 늘 호박이 굴러다녔다는데, 둥글납작하고 찌그러진 별별 형태들에서 묘한 매력을 발견했더란다. 데뷔는 그즈음 지역아티스트를 대상으로 한 작은 전시였다. 다양한 크기의 호박을 일본 전통화 기법으로 그려내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쿠사마의 작가로서의 삶이 그리 평탄했던 건 아니었다. 1952년 고향에서 연 첫 개인전에 ‘관람객 제로’를 기록한 충격이 컸다. 1957년 미국으로 떠날 때 그림 2000여점을 불태우며 훗날을 다짐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한참 ‘소강’ 국면이던 호박이 다시 등장한 건 1973년 미국생활을 접고 일본으로 귀국하면서다. 16년 만에 돌아온 일본에서의 환대가 미적지근했다는데. 차라리 그 덕이었을지도 모른다. 회화·판화·조각·설치 등에 본격적으로 ‘호박 시리즈’가 등장한다. 정점은 83세던 2012년 찍었다. 명품브랜드 루이비통과 여성아티스트 최초로 콜래보레이션을 성사시켰고, 그 사옥 외관을 노란 나무와 그물망 패턴으로 도배했다니까.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전 전경. 그물망 배경에 화병·과일박스 등을 다양하게 앉혀낸 작품들이 ‘호박 시리즈’와는 닮은 듯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왼쪽부터 ‘꽃 C’(2005), ‘꽃 C’(2005), ‘과일바구니’(2000·), ‘꽃 PX’(1993)(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누구는 쿠사마가 변혁적이고 진취적이라고 한다. 성차별·인종차별도 모자라 강박·환각증에 손가락질해온 세계와 ‘맞장’ 뜬 투쟁사를 썼다고도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이가 한 일은 보이는 대로 그리고, 느끼는 대로 만들며 세상을 표현한 것뿐인데. 그저 그 세상이 누군가와 좀 달랐을 뿐이다. 전시에는 그 서로 다른 세상을 연결한 또 다른 볼거리가 있다. 쿠사마를 오마주한 국내 신진작가 4인의 평면작품 6점이다. 김보미는 세상의 호박들이 손을 잡고 서로 바라보는 듯한 ‘무제’(2021)를, 노현영은 비단에 먹과 물감을 올려 쿠사마의 호박 곁에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 ‘초충도’(2021)를 내놨다. 또 윤오현은 ‘정신적 과잉활동’(2021), 이본은 ‘패턴 1·2’(2021)로 경의를 표하며, 쿠사마 세상으로 가는 다리를 놨다. 전시는 9월 23일까지.

‘쿠사마 야요이: 오리엔탈의 빛’ 전 전경. 국내 신진작가 4인이 쿠사마를 오마주한 작품들을 내놨다. ‘전시 속의 전시’다. 오른쪽부터 노현영의 ‘식탁’(2021)과 ‘초충도’(2021), 김보미의 ‘무제’(2021), 이본의 ‘패턴 1·2’(2021), 윤오현의 ‘정신적 과잉활동’(2021)(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