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상·누드모델 수업… '최초' 그려나간 선각자[정하윤의 아트차이나]<24>
by오현주 기자
2023.03.24 00:01:00
▲중국 최초 서양화가 ''리수퉁''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인 ''자화상''
스승 구로다에 배운 일본식 서양화
중국 돌아와선 학생들 교육에 매진
붓·캔버스 들쳐메고 야외사생 나서
불혹 직전 돌연 속세 떠나 승려로
끝까지 선각자로서의 사명감 가져
| 리수퉁의 ‘자화상’(1911). 1905년 일본으로 건너간 리수퉁이 도쿄미술학교에서 5년간 수학하고 졸업작품으로 제출한 그림이다. 중국인이 그린 첫 서양화로 꼽힌다. 서양화로 그린 자화상으로도 처음이다. 그리는 대상의 비례·형태를 정확하게 잡고, 경직된 화면을 밝은 색으로 풀어내는 등, 당시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 그랬듯 스승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은 ‘일본식 서양화풍’이 보인다. 인물의 배경에 둔 모자이크식 바탕은 신인상주의 방식을 적용한 리수퉁의 ‘실험’이다. 캔버스에 유채, 60.6×45.5㎝, 일본 도쿄예술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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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인자한 미소를 띠고 앉은 한 남자가 보인다. 딱히 틀린 데는 없지만 그렇다고 확 뛰어나 보이지도 않는 이 작품은, 중국에서 처음 서양화를 배운 사람으로 미술사에 기록된 중국 화가 리수퉁(李叔同·1880∼1942)의 ‘자화상’(1911)이다. 1911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면서 학교에 제출한 그림인 ‘자화상’은 중국 사람이 그린 서양화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그림 중 하나다. 작품의 우수성은 차치하고서, ‘처음’이란 사실만으로도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그러고 보니 서양화 개척자로서의 자부심과 5년간의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한다는 안도감이 입가의 미소에 담겨 있는 듯하다.
리수퉁이 다녔던 도쿄미술학교는 당시 서양화를 제대로 가르치는 몇 안 되는 학교였고, 청나라와 조선 유학생들이 서양 문물과 예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한 우수한 기관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서양화가 1호인 고희동, 2호인 김관호, 3호인 김찬영 모두 이 학교를 졸업했다(고희동과 리수퉁은 유학기간이 2년 정도 겹치지만 친분에 대해 깊이 연구된 바가 없다).
도쿄미술학교가 각 나라의 서양화 효시들을 배출할 만큼 우수한 학교였던 것은 팔할이 구로다 세이키(1866∼1917) 덕분이다. 일찍이 파리에서 유학하며 ‘잘 그리는 서양화’를 마스터한 구로다는 본국으로 돌아와 ‘일본식 서양화’를 만드는 데 온 힘을 쏟았다. 형태의 정확성과 인상주의식 파스텔톤 컬러를 조합한 화면이 그 연구의 결과물이었고, 그의 이런 화풍은 도쿄미술학교, 나아가 관에서 주도하는 전시회의 모범답안처럼 여겨졌다.
구로다에게 직접 사사받은 만큼 리수퉁의 작품에는 구로다의 영향이 짙게 배어 있다. ‘자화상’의 방식, 다시 말해 비례나 형태는 정확히 그리되, 색채에서는 밝은 색을 사용하는 것이 바로 구로다로부터 배운 ‘일본식 서양화’였다. 다만 스승의 방식에 리수퉁은 나름대로 실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배경을 마치 모자이크처럼 얼룩덜룩하게 칠해 신인상주의식 방식을 적용한 것이 그것이다.
나라가 외세의 침략에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던 청나라 말,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이 분명 보통 집안에서 가능한 일은 아니었을 거다. 리수퉁은 소금상인이자 은행가였던 할아버지를 둔 덕분에 넉넉하게 생활하며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네 살 때는 아버지를, 열다섯 살쯤에는 어머니를 여의었음에도 이복형들 덕분에 어렵지 않은 생활을 지속했다.
| 리수퉁의 ‘반라의 여인’(1909). 리수퉁이 도쿄미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습작한 작품 중 하나다. 스승 구로다 세이키가 만들고 가르친 ‘일본식 서양화’를 따라 화면에 든 구성요소의 정확한 형태와 인상주의식 파스텔톤 색이 조화를 이루는 그림으로 제작했다. 캔버스에 유채, 91×116.5㎝, 중국 베이징 CAFA 아트뮤지엄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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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것은 리수퉁의 관심사가 미술에만 국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쿄 유학 시절 그는 미술뿐만 아니라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음악잡지 편집을 맡기도 했다. 글도 잘 썼는데, 그가 쓴 음악잡지 서문을 읽어 보면 “음악은 영혼을 아름답게 하며 사회적 관습을 변혁시킬 수 있다”고 쓴 글 솜씨를 볼 수 있다. 그는 동시에 저물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슬퍼하며 “플루트의 구슬픈 소리가 남쪽 산하에 타고 흐르는 눈물을 전달한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음악을 들을 줄 알고, 글로도 표현할 수 있었던 거다. 이쯤 되면 전문 음악평론가라 할 만하다.
리수퉁이 진심을 다했던 또 하나의 분야는 연극이다. 이미 아마추어로서는 수준급인 베이징 오페라 연기자였던 그는 일본에서도 연극을 공부하고 연기활동을 병행했다.
1910년 귀국 후의 행보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술과 음악 모두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선구자적 역할을 감당했다. 먼저 꽤 열정적이고 혁신적인 미술선생이었다. 리수퉁은 학교 커리큘럼에 석고 모형을 도입하고, 학생들을 데리고 야외 사생을 나갔다. 지금에야 석고 데생을 한다는 것이 구태의연하고 낡아빠진 구시대의 잔재로 여기지만, 100년 전 중국에서는 과학적인 관찰과 서양식 테크닉을 익힐 수 있는 최첨단 교육방식이었다.
야외 사생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의 그림을 보고 똑같이 그리는 것이 미술교육이던 중국에서 붓과 캔버스를 들쳐 메고 굳이 밖으로 나가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내가 내 눈으로 보는 세상을 표현하겠다’는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는 신식교육이었다. 나아가 리수퉁은 서양미술사를 가르치고, ‘서양미술사강의’를 집필했으며, 1914년에는 무려 누드모델 수업까지 감행했다. 이 모두가 중국 미술교육에서는 ‘최초’로 기록된 사례들이다. 자국에서 가장 먼저 서양화를 배운 사람이라는 책임의식이었을까. 리수퉁은 전문화가로서의 입지를 다지기보다는 이처럼 교육에 헌신했다.
음악교육에도 열을 올려 대부분 중국인 1세대 음악교사들은 리수퉁의 제자였다. 더불어 많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곡은 지금도 모든 중국인이 즐겨 부른다는 ‘송별’이다. 존 오드웨이가 1868년에 쓴 곡인 ‘고향집과 어머니’(Dreaming of Home and Mother)에 중국어 가사를 붙인 노래다. 리수퉁은 중국에서 처음으로 합창곡을 작곡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 분야를 잘하는 것도 어려운데, 무려 두 분야 모두에서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활동은 길지 않았다. 많은 힘을 한꺼번에 쏟았기 때문일까. 리수퉁은 1918년, 모든 것을 떠나 돌연 승려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유혹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불혹 직전이었다. 승려가 된 이후 리수퉁은 이름도 ‘홍이’로 바꾸고, 미술·음악·글 등 그가 재주를 보인 대부분에서 손을 놓았다.
| 리수퉁의 ‘무제’(연도미상). 리수퉁이 불교로 귀의한 뒤 그린 작품으로 추정한다. 미술은 물론 음악·글쓰기 등에 뛰어난 재능을 가졌던 리수퉁은 중국 예술교육 분야에서 활약하던 중 서른여덟 살인 1918년 돌연 속세를 버리고 출가했다. 이후엔 ‘홍이’란 이름으로 살았다. 종이에 채색, 42.5×47.5㎝, 개인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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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히 ‘르네상스맨’이라 불릴 만큼 다방면에 재주가 있던 리수퉁. 게다가 그는 모든 역사에서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처음’이란 타이틀을 미술·음악에서 골고루 거머쥔 선각자였다. 그런 그가 속세를 완전히 버렸다는 선택은 놀랍다. 게다가 리수퉁은 처자식이 있는 가장이었다.
무슨 큰일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리수퉁은 교육 쪽에 무거운 사명감을 끝까지 갖고 있었다. 자신의 출가 결심을 알리면서 “나라 교육의 발전에 더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고까지 말했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 속을 어찌 다 알겠느냐마는, 직접 남긴 글을 참조하면 어느 정도는 추리할 수 있다. 리수퉁은 마음을 나누던 친구에게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 문득 깨달은 이후 사는 일이 무료하고 재미없어졌으며 전문적인 커리어를 이어갈 열심을 잃었다’고 고백했다.
학자들은 추측한다. 일찍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망하고, 나라마저 망하는 과정을 겪었던 그였기에 ‘삶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일찍 깨달았을 거라고. 그래서 마흔이 채 되기 전에 이미 현생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사라져버렸고,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다는 불교에 귀의한 거라고 말이다. 그럴듯한 해석이다. 하고 싶은 예술은 다 했고, 사회에서 한자리 차지하며 탄탄대로를 살았던 것 같은 리수퉁에게도 깊은 슬픔과 아픔은 있었으니까. 어려운 시대에 선각자의 사명을 감당한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리수퉁, 아니 승려 홍이가 사망하기 전 남긴 네 글자는 ‘비흔교집’(悲欣交集)이다. ‘슬픔과 기쁨은 뒤섞여 있다’는 이 선각자의 마지막 말에 계속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