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 소셜미디어는 소셜한가

by김민구 기자
2016.02.26 04:00:00

[이재원 문화평론가] “오래 전부터 치밀하게 자살을 준비해왔던데.”

백화점 과장 영수(김인권 분)는 회사에서 상사 눈치, 집에서 가족들 눈치를 보며 격무에 시달리는 전형적인 을(乙)이다. 백화점 옥상 플래카드를 손 보려고 올라갔다 실족해 죽게 된 그는 지옥행 티켓을 받게 된다. 하루 두 끼 인스턴트, 수면부족으로 ‘명백한 학대 행위’를 한 데다 뇌경색, 심근경색, 간경화 등 15가지 지병을 갖고도 건강을 방치한 ‘자발적 자살자’라는 게 이유였다. 24일 시작된 SBS 수목드라마 ‘돌아와요 아저씨’(극본 노혜영, 연출 신윤섭) 이야기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막 살았네”라는 영수의 말처럼 어쩌면 일상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을 ‘학대’할 지도 모른다. 지난 1주일간 어떤 음식을 먹고, 몇 시간 수면을 취하였는지 모르는 채로 하루 하루 주어진 일을 해 나가느라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는 이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더구나 스스로의 마음 상태까지는 꾹 눌러둔 채로 사는 경우가 다반사다.

소셜 미디어에 등장하는 우리 주변 일상은 영수와는 정반대다. 화사하고 아름답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사진, 화보에 나올 법한 풍경, 프로페셔널한 글까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산뜻해진다. 거래처 앞에 무릎을 꿇는 굴욕도, 상사에게 “잘 하는게 뭐냐”고 무시당하는 일도, 결혼기념일에 남편 상사의 상가에서 심부름을 해야 하는 아내 마음도 없다. 소셜미디어는 소셜(social), 즉 사회적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과 이용하는 소통 창구이기 때문일까. 소셜미디어를 자신의 약점 보다는 장점을 드러내는 장치로 여기는 것만 같다.



소셜미디어의 ‘소셜’은 전통적 의미의 ‘사회적’이라는 뜻과 차원이 다르다. 소셜미디어 이전 ‘사회적인 사람’은 보통 양질의 사람들과 호의적이고 깊은 관계를 맺고 그들과 직접 만나기도 하는 사람을 뜻했다. 소셜미디어에서는 전화를 걸어 친구와 시간 약속을 잡지 않는다. 소셜 미디어의 알고리즘, 디폴트, 코드 등 기술적 요인은 친구 소식을 나에게 끊임없이 전달해준다. 예컨대 페이스북은 ‘알 수도 있는 친구’를 지속적으로 추천하고 ‘친구’가 봤던 콘텐츠를 이용자 타임라인에 보이게 하는 알고리즘으로 날마다 친구를 만나게 한다. 친구의 글과 말을 확인하라는 빨간 알림이 스마트폰에 실시간으로 반짝거린다.

과연 우리는 그 친구들과 얼마나 사회적이며 얼마나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고 있을까. 암스테르담대 교수 반 다이크는 ‘연결성 문화: 소셜미디어의 비판적 역사’에서 소셜미디어의 사회성은 질(質)이 아닌 양(量)으로 전환된다고 지적했다. 예컨대 페이스북에서 감정 표현은 오직 ‘좋아요’ 하나의 키로만 표시한다. ‘나빠요’를 표현할 수 없는 작동방식에서 ‘좋아요’는 결국 수(數)를 뜻한다. 이용자와 친밀한 관계이든,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이든, ‘친구’로 동일한 가치가 주어져 연결된다. 친구 수가 많으면 트렌드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이는 산업적인 필요와 맞닿게 된다.

물론 소셜미디어는 분명 일반인 목소리를 담을 그릇을 마련해주고 갑(甲)의 목소리가 아닌 을의 목소리를 모아 집단지성의 힘을 보여줄 공간이 있다. 그러나 연결성의 작동 방식은 새로운 유형의 사회성을 요구하고 이에 대한 피로도를 호소하는 경우도 있다.

온라인에서도 질적으로 풍부한 관계를 원하는 요구 덕분에 어라운드와 같은 익명 소셜미디어가 단기간에 자리잡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익명 소셜미디어에는 과거 소셜미디어에서 보기 어렵던 내용이 채워지고 있다. 온라인에서 새로운 사회성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반갑다. 그럼에도 눈을 맞추고 목소리를 들으며 친구와 대화하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몇 해 동안 페이스북에서 날마다 소식만 봤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