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藝인] 60년을 '밀어냈다'…단색화 거장 하종현의 '마대'

by오현주 기자
2022.02.22 03:30:00

△국제갤러리서 개인전 연 하종현 화백
돈 없어 캔버스 대신 쓴 마대로 거장 반열
천 뒷면에서 물감 밀어내는 '배압법' 방식
60여년 마대작업 집대성한 39점 한자리에
'접합' '이후-접합' '다채색 접합' 진화로
"멈추지 않고 평생 변화한 것 자랑스럽다&qu...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전경. ‘단색화 거장’으로 불리는 하종현 화백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한 39점을 건 전시장, 한쪽 벽면의 두 작품 앞에 한 관람객이 오래도록 머물렀다. 왼쪽은 ‘접합 20-90’(2020·162×130㎝), 오른쪽은 ‘접합 21-91’(2021·162×130㎝)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종현(87) 화백. 평생 그이가 씨름해온 대상이 있다. ‘마대’다. 흔히들 ‘마대자루’라 부르는 그거다. 과거엔 먹거리를 넣었고 지금은 폐기물이나 담아버리는. 삼실을 소재로 독특하게 만든, 표현만 그랬던 그 주머니가 아니다. 진짜 마대였다. “화가가 무슨? 예술가의 치기 아니야?”

그래, 요즘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한국전쟁 직후 보릿고개에 목숨을 내놓던 시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하얗고 빳빳한 캔버스는 그이에겐 감히 넘볼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우연찮게 발견한, 주둔했던 미군이 버리고 간, 마대는 되돌아보면 다시 없을 횡재였다. 그림이, 아니라면 뭐든 될 것 같았으니까.

시작이 그랬다. 1959년 홍익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전도유망한 예비화가’로 불렸더라도 당장은 밥벌이가 더 급한 ‘신진작가’였을 뿐. 화백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캔버스 살 돈이 없어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에라도 그려보자고 시작했다. 그게 1960년대니 평생을 마대와 싸운 셈이다.”

하종현의 ‘이후-접합 09-02’(2009·120×200㎝). 마대 대신 나무를 들여 변화를 준 ‘이후-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틈새에 물감을 넣고 접합해, 물감이 삐져나오게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면 그이는 마대와 어떻게 싸웠던 건가. 올이 굵고 성긴 삼실로 짠 마대 위에 정상적인 붓질로 그림을 그린다는 건 누가 해도 ‘임파서블한 미션’이 아닌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마대를 펴보고 까보는 궁리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흐느적거리는 마대를 좀 빳빳하게라도 만들어보자, 뒷면에 물감을 칠해보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여지없이 성긴 틈새로 물감이 죄다 삐져 올라올 수밖에. 그런데 ‘이것도 쉽지 않구나’ 했던 그 순간, 뭔가 보였다. 삐져나온 물감이 만든, 아주 특별한 무늬가 보인 거다. “올이 굵고 억세 마대 위에 그리는 건 어려웠다. 결국 물감을 뒤에서 밀어냈고, 그 작업을 일생에 걸쳐 연구하고 실행했던 셈이다.”

천 뒤에서 두껍게 물감을 발라 앞면으로 밀어내는 ‘배압법’이란 그럴듯한 이름이 생긴 건 한참 뒤였다. 오롯이 혼자 만들고 활용하고 응용한, 마대로 쌓고 세운 화백 자신만의 세계를 다져나갔을 뿐. 하지만 끝이 나질 않는다. 여전히 그이는 마대와 씨름을 하는 중이라니까. 화업 60여년을 다 바쳐 밀어냈는데도 말이다.

하종현의 ‘접합 21-51’(2021·117×91㎝). ‘접합’과 ‘이후-접합’에 이어 내놓은 ‘다채색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단색화’의 선구자. 세계 미술시장에 내놓는 한국 현대미술의 사조로 거의 유일하다고 할 그 단색화 부문에 화백은 박서보(91)·정상화(90) 등과 함께 거장 반열에 오른 대표작가로 꼽힌다. 덕분에 원조식량을 담던 마대는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형편인데도, 화백은 아직도 ‘마포’를 주재료로 삼아 작업한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에서 연 ‘하종현 전’은 구순을 내다보는 ‘현역’ 작가의 마포작업을 집대성한 자리다. 국제갤러리에서만 세 번째 개인전(2015·2019)으로 꾸린 그곳에 화백은 39점을 내놓았다. 100호(162×130㎝) 규모 이상의 대작이 압도하는 전시에는 1990년대부터 바로 얼마 전까지 작업한 작품들을 걸었는데, 그중 2021년 신작만 16점이다.



하종현 화백이 ‘이후-접합’ 중 한 작품 앞에 섰다. 2015년, 2019년에 이어 2022년, 국제갤러리서 세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는 하종현 화백은 “언젠가 자신의 흔적을 모아두고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사진=국제갤러리).


화백의 작업은 크게 세 가지 줄기로 가름할 수 있다. 마대 뒤로 물감을 밀어내는 배압법의 오리지널 격인 ‘접합’(Conjunction)이 하나다. 이후 배압법에 진화를 끌어낸 응용버전이 태어났는데 그래서 다른 그 하나를 ‘이후-접합’(Post-Conjunction)이라 불렀다. 또 다른 줄기는 ‘다채색 접합’. 기왓장이나 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채색 계열의 단색으로 이어가던 기존의 ‘접합’ 연작에 알록달록한 밝은 원색을 입혔다는 게 다른 점이랄까.

‘접합’과 ‘다채색 접합’이 ‘마대와의 씨름’을 이어가며 변화를 추구한 흔적이라면 ‘이후-접합’은 마대 대신 나무를 들인 진화라는 점에서 특별하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가로 혹은 세로로 접합하는 식인데, 그 틈새에 물감을 넣어 마대 때와는 다른 형태와 힘으로 밀어낸 작업인 거다.

하종현의 ‘이후-접합 10-37’(2010·120×180㎝). 마대 대신 나무를 들여 변화를 준 ‘이후-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 길게 잘라내 길이를 맞춘 나무틀을 틈새에 물감을 넣고 접합해, 물감이 삐져나오게 했다. 오른쪽 작은 사진은 작품의 부분을 확대한 디테일(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전경. 최근에 작업한 ‘이후-접합’ 연작이 나란히 걸렸다. 나무틀 사이로 삐져나온 물감에 주걱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만들어냈다. 오른쪽부터 ‘이후-접합 21-303’(2021·91×73㎝), ‘이후-접합 21-203’(2021·61×73㎝), ‘이후-접합 21-501’(2021·91×117㎝)(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물감이 마대를 타고 오른 그 지점에 얹어낸 장치는 우직한 ‘덤’이다. 삐져나온 물감을 바탕으로 그 위에 묵직하게 색을 칠하기도 하고 붓이나 주걱으로 날카로운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그 장치가 어떤 것이든 그이의 일생을 관통해온 ‘접합’은 ‘밀어내는 것’, 또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것’과 긴밀한 연결이었다. 물질과 물질을 만나게 하고, 재료와 행위를 만나게 하는.

모교인 홍익대에서 미대학장(1990∼1994)을 지냈고 서울시립미술관장(2001∼2006)도 거쳤다. 그런데도 그이를 두곤 천생 ‘작가’라 한다. “한자리에 멈춰 있는 게 싫고 평생 변화한 작업이 자랑스럽다”고 하니.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었던 두 차례의 대규모 전시, ‘한국의 단색화’ 전과 ‘회고전’은 어찌 보면 신호탄 같기도 했다. ‘작가 하종현’을 알아보고 작품을 소장한 기관과 아닌 기관을 구분케 하는. 파리 퐁피두센터, 뉴욕 현대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미술관, 홍콩 M+, 도쿄도현대미술관을 돌아 국립현대미술관과 삼성미술관 리움까지, 화백의 작품이 걸쳐 있는 스펙트럼은 그만큼 광범위하다.

하종현의 ‘접합 21-96’(2021·227×182㎝). 기왓장이나 백자를 떠올리게 하는 무채색 계열의 단색으로 이어간 가장 대표적인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종현의 ‘접합 21-75’(2021·162×130cm). ‘접합’과 ‘이후-접합’에 이어 내놓은 ‘다채색 접합’ 연작 중 한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예전엔 안 팔린 채 쌓여가는 작품이 걱정이었다면 이젠 “누가 작품을 가져갈까가 걱정”이란다. 언젠가 자신의 흔적을 모아두고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생겼다고 했다. 그런데 어쩌겠나. 그이의 작품은 국내 미술시장에서도 ‘없어 못 사고 못 팔 만큼’ 귀하다.

지난해 가장 뜨겁고 치열했던 경매시장은 그 한 토막이었다. ‘낙찰총액 30순위 작가’ 중 20위에 이름을 올린 화백은 출품작 35점 중 33점이 팔려나가며 낙찰률 94.29%를 써내기도 했다. 낙찰총액은 27억 2672만원. 8월 케이옥션에서 팔린 ‘접합 96-101’(1996·120×280㎝)이 가장 컸다. 4억 1000만원에 새 주인을 찾아갔다. 같은 달 서울옥션에선 ‘접합 99-13’(1999·120×180㎝)이 3억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올해 1월 케이옥션에선 ‘접합 97-015’(1997·130×162㎝)가 3억 1000만원을 부른 응찰자와 만나기도 했다.

비록 덥석 손에 쥐진 못한다 해도 마음에 소장하려는 이들도 몰리는가 보다. 지난 15일 전시를 개막한 이후 엿새 동안 1860명이 다녀갔단다. 전시는 내달 13일까지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제갤러리 ‘하종현 개인전’ 중 1990년대와 2000년대 작품을 모아둔 전시장에 걸린 하종현의 ‘접합 06-005’(2006·260×194cm)를 한 관람객이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