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의 계절' 여지없이 고발장 난무…심화되는 '정치 사법화'[고소·고발 공화국]...
by남궁민관 기자
2021.11.25 05:00:00
사세행, 윤석열 상대 공수처에 26건 고발장 접수
법세련은 범여권 인사 상대 올해만 100건 고발해
"의혹·갈등 해결할 정치 실종…손쉬운 고발 선택한 것"
매년 고소·고발 90건 중 기소 5분의 1 그쳐…"수사 기관도 적극 각하해야"
[이데일리 남궁민관 하상렬 기자] 내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선거의 계절’이 본격화되자, 여지없이 ‘고소·고발의 계절’도 함께 시작됐다. 우리나라는 ‘법대로 하자’는 관용구가 있을 정도로 고소·고발 오남용이 심각한 수준이다. 더욱이 최근에는 이른바 ‘프로 고발러’로까지 불리는 시민단체들이 대선 후보들과 관련한 고발장을 쏟아 내며 우려를 더욱 키우는 모양새다. 법조계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 수단으로써 고소·고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지나친 오남용은 정치가 사법부에 예속되는 ‘정치의 사법화’를 재촉할 수 있다며 제도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시민단체 ‘사법정의 바로 세우기 시민 행동(사세행)’은 지난 22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현대자동차그룹의 이명박 전 대통령 소송비 대납 사건을 부실 수사했다며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에 대한 26번째 고발장을 접수했다. 이미 공수처는 사세행 고발장 중 △옵티머스 펀드 사기 부실수사 의혹 △한명숙 전 국무총리 수사팀 모해위증교사 수사 방해 의혹 △고발사주 의혹 △판사 사찰 문건 의혹 등 4건을 입건해 수사 중인데, 현재 △장모 대응 문건 의혹도 입건 여부를 두고 고심 중이다.
사세행이 범야권, 특히 윤 후보를 겨냥한 고발 행진을 잇고 있다면, ‘법치주의 바로 세우기 행동 연대(법세련)’의 경우 올해에만 범여권을 상대로 100여 건의 고발장을 접수했다. 법세련의 고발 대상에 이름을 올린 이들은 박범계·추미애 등 전현직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이성윤 서울고검장, 김진욱·여운국 공수처 처·차장, 윤 후보의 고발 사주 의혹 제보자 조성은 씨 등으로 대체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와 범여권 인사들을 감시·견제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수사 기관들은 쏟아지는 고발장 처리에 고심이 많다. 이들 시민단체들의 고발은 대체로 단순 언론 보도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터넷 게시물 등만을 근거로 하고 있어, 불필요한 사회적 분쟁이나 논란을 유발할 뿐 아니라 피고소·피고발인의 인권 침해, 수사력 낭비, 사회적 비용 증가 등 부작용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고소·고발 오남용은 심각한 수준이다. 검찰과 경찰 등 국내 수사 기관은 지난 2016년부터 2020년까지 5년 간 매년 90만 건 안팎의 고소·고발을 접수했다. 2016년 88만6400건, 2017년 84만9222건, 2018년 89만5977건, 2019년 93만2044건을 기록한데 이어 지난해에는 코로나사태에 따라 대외 활동이 줄었음에도 90만3895건에 달했다. 우리나라와 형사 사법 시스템이 유사한 이웃나라 일본의 경우 연간 검찰과 경찰에 접수되는 고소·고발이 많아 봐야 1만5000건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무려 60배가 넘는 수준이다. 문제는 이 같은 고소·고발이 난무해도 실제 기소 송치 또는 기소로 이어진 건수는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서울지방변호사회 회장을 지낸 김한규 변호사는 “시민 단체들의 고소·고발 횟수가 지나치게 많고 때론 고발 내용도 부실한 경우가 많다”며 “수사 기관들은 고소·고발을 접수하게 되면 신속히 처리하고 요건에 따라 각하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무분별한 고소 고발을 차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
법조계는 특히 일부 시민단체들이 진영논리에 따라 고소·고발을 남발하는 원인으로 우리나라의 ‘후진적 정치’를 꼽으며, 이에 대한 선진화 노력이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의혹 또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선 공론화와 토론이 우선돼야 하지만, 이를 펼칠 정치적 ‘공공의 장’이 부족하다보니 보조적 수단인 고소·고발이 만능처럼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교수는 “사회적 의혹이나 갈등은 정치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정치가 후진적이다보니 사회적 분노나 불만을 분출할 통로를 찾지 못하고 고소·고발이라는 손쉬운 수단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라며, “정치적 사안을 법으로 해결하려는 이른바 ‘정치 사법화’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