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습니다] 윤범모 "홍라희 전 관장에 '3자 협업' 제안했다"

by오현주 기자
2021.08.30 03:30:00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 인터뷰
리움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국립중앙박물관
이건희컬렉션 공통분모 기획·전시 협의체로
홍 전 관장에게서 "그렇게 하자"는 대답들어
1488점 기증, 과천·청주관 수장고 95% 포화
지자체 협의해 지역·미술관 상생 모색 구상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둘러보다 잠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57점을 걸고 세운 전시에 뒤로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1950s·왼쪽부터), ‘3-Ⅹ-69 #120’(1969), ‘산울림 19-Ⅱ-73 #307’(1973)이 보인다. 윤 관장은 “삼성가에서 특히 귀하게 아끼던 작품이 ‘여인들과 항아리’”라며 “만약 이 작품을 오늘 경매에 올린다면 시작가가 300억원쯤은 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숨가쁜 시간이었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이었다. 온 국민이 한마디씩 거드는, 말 그대로 ‘초미의 관심사’가 아닌가. 게다가 대상은 이건희(1942∼2020) 회장의 유족이다. 결코 편하다고 할 수 없는 그들을 상대로, 1969년 개관 이래 52년 만의 가장 굵직한 ‘대형사건’을 처리해야 했다. 그것도 조용히 빠르게.

윤범모(70) 국립현대미술관장. ‘이건희 소장 미술품 기증’, 그 과정에서 굳이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 그이여야 할 거다. 드러내지 않고 움직였다. 기증 발표 한 달여 전 이 회장 유족을 만나 ‘아주 특별한 제안’을 받았고, 가장 먼저 작품들을 실견했으며, 그 한 점 한 점이 옮겨지는 것을 뒤에서 지켜봤다. 서울 용산구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 수장고와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수장고를 오가며 5t 규모 무진동차량 18대에 실어나른 미술품이 1488점. 긴장감이 극에 달했던 운송과정이 모두 끝나고 드디어 ‘반입완료’ 사인을 받았다. 지난 4월 23일의 일이다. 유족의 발표는 닷새 뒤 나왔다.

그렇게 4월 28일, 소문만 무성하던 ‘이건희컬렉션’, 정확하게 말하면 이 회장이 개인소장했던 미술품 중 유족이 선별한 기증작이 베일을 벗었고, 이후 4개월이 지났다. 기증작 가운데서도 ‘정수 중 정수’라 할 대표작들이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형식으로 대중을 만난 지도 한 달하고 열흘이다. BTS 공연만큼이나 예약이 어렵다는 그 바늘구멍을 뚫고 다녀간 관람객은 8900여명. 시간당 30명으로 제한해서 그 정도다. 기증 결정부터 특별전까지, 솔직히 ‘이건희’란 타이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긴박한 진행’이었다. 그 ‘긴박한’ 중엔 전국 지자체를 들끓게 했던, 대통령이 지시하고 주무부서 장관이 받든 ‘이건희미술관’의 부지 선정 이슈까지 있었으니.

최근 윤 관장을 이데일리가 단독으로 만났다. 누구보다 마음을 졸이며 쌓았을 고단함이 왜 없었겠는가. 이젠 그 짐을 좀 덜었는지, 스스로 표현했던 진짜 ‘행복관장’의 얼굴이다. “이제는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물었더니 “인생살이는 변화무쌍한 것, 마음먹기에 달렸더라”는 선답이 왔다. 잠시 마주 보고 웃었다.



―“생애 가장 큰 영광”이라 했던 이건희컬렉션 기증 이후에 4개월이 지났다.

“특별전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맞는 작품이 백남순의 ‘낙원’(1936)과 이상범의 ‘무릉도원’(1922)이다. 둘 다 이상향을 그린 작품인데 이건희컬렉션의 대량 기증이 미술관에 낙원을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사막의 오아시스라고 할까. 전시에 부제를 붙인다면 ‘미술관의 낙원’이라 해도 될 거다.”

그도 그럴 것이 백남순의 ‘낙원’은 윤 관장에겐 가슴에 들인 작품이기도 하다. 몇 점 전하지도 않는 작가의 그 작품을 처음 발굴한 이가 바로 윤 관장이었던 거다. 1980년대 취재하고 글을 쓰던 시절, 소장자(백남순이 친구 민영순에게 결혼선물로 줬다)를 찾아 용산구 이촌동 한 아파트로 갔고, 높이 173㎝, 폭이 372㎝나 되는 8폭 병풍의 작품사진을 집안에선 찍을 수가 없어 아파트 옥상까지 끌고 올라가 촬영했다고 했다. 이후 그 ‘낙원’은 이 회장의 소장품이 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에 걸린 백남순의 ‘낙원’(1936) 앞에 섰다. 전시장에 들어서서 처음 관람객을 맞는 이 작품은 윤 관장에게 ‘각별하다’. 1980년대 윤 관장이 소장자를 찾아 처음 발굴해 세상에 알린 작품이기 때문. 이후 작품은 이건희 회장의 소장품이 됐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기증작 중엔 대형작가의 작품이 아닌 것도 꽤 있다.

“이 회장이 근대미술 초기작을 모조리 수집할 때가 있었다.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인데 몇 점 남아있지 않은 경우라면 대부분 사들였다. 시장성에 상관없이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듯하다. 돈이 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 이 회장 유족의 기증 의사를 받았을 때 어땠나.

“소박하게 미술관에 빠진 것만 채워주면 좋겠다 생각했다. 그런데 1488점이나 된 거고. 기본적으로 유족은 미술관 소장품에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증작 선별부터 그랬다. 그래서 리움미술관 소장품 몇 점이 따라온 걸로 안다. 기증을 위해 사전에 우리 미술관의 소장품까지 파악했던 거다. 유족 중 누구의 의견이라기보다 가족 전부가 합의를 본 일이다.”

어쩔 수 없이 국립현대미술관은 이건희컬렉션 전후로 나뉠 수밖에 없게 됐다. 그 이전, 반세기 동안 기증받고 또 사서 모은 소장품은 8782점. “언제 1만점을 채우나” 했던 역대 관장들의 소원이 이건희컬렉션 기증작 1488점으로 불현듯 현실이 됐다. ‘소장품 1만점 시대’가 열린 거다. 게다가 한 해 소장품 구입예산 48억원(2021년 기준)으론 언감생심이던, 수십억원대 김환기의 점화, 이중섭 소 그림까지 품을 수 있게 됐다.

―이건희 회장, 홍라희 전 관장과 인연이 있던 걸로 안다.

“중앙일보가 서울 서소문에 신사옥을 지으며 퍼포먼스를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이병철 선대 회장의 특명이었다. 호암갤러리가 그때(1984) 생겼고, 내가 전시기획 책임자로 일하게 됐다.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의 당시 공식직함이 중앙일보 상무이사였는데, 선대 회장이 며느리에게 ‘미대 출신이니 맡아서 해봐라’ 했던 게 홍 관장이 미술관 운영을 시작한 출발점이 됐다. 국내에 대형전시가 없던 시절이라 그만큼 호암갤러리 전시는 독보적이었고, 전시작 중 많은 작품을 이건희 회장이 구입했다. 당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학예실도 없던 때라 덕분에 내가 ‘뮤지엄큐레이터 1호’로 불리기도 했다.”

이데일리와 인터뷰 중인 윤범모 국립현미술관장. 윤 관장은 “아무리 문턱 없는 미술관을 표방해도 일반인에게 미술관은 여전히 신전처럼 보인다”며 “이번 기증이란 사건이 미술관을 일반어로 전국화하는 데 기여한 바가 크다고 본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특별전에 홍라희 전 관장과 이서현 이사장이 다녀갔다는데.

“맞다. 한 작품, 한 작품 공들여 봤고 ‘한자리에 모으니까 좋네요’라고도 했다. 관람 중 가끔 탄식도 나오더라. ‘이 작품, 우리집에 걸렸던 건데’ ‘이 그림은 선대 회장이 구입하셨던 건데’ 하는. 대부분 홍 관장의 혼잣말이었다.”

홍 전 관장과 이서현 삼성복지재단 이사장이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관람한 건 전시 개막 다음날이었다. ‘기증자 예우’도 사양하고 일반인 관람에 맞춰 전시를 둘러봤다. 이후 윤 관장과 따로 만난 자리에서 홍 관장은 “기증작을 잘 활용을 해달라”는 말을 전했단다. 처음 기증 의사를 밝혔던 때와 다를 바가 없더라고 했다. ‘뭘 해드릴까’ 물었더니 ‘해주실 게 없다’고 했다는 거다. 되레 제안을 한 건 윤 관장이었단다.

―어떤 제안이었나.



“3자협의체를 제안했다. 리움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 국립중앙박물관이 함께하는. ‘이건희컬렉션이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으니 서로 협업체제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말했다. 공동기획도 하고, 공동전시도 하고. 소장품의 소유권이 어디에 있든 같이 활용할 수 있는 카드를 함께 쓰는 게 좋겠다고도 했다. 이제 이건희컬렉션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됐으니 공동으로 꾀할 수 있는 미술문화 발전방안으로 이보다 더 바람직한 게 있을까 싶었다. 홍 관장에게서 ‘그렇게 해보자’는 대답을 들었다.”

이건희컬렉션의 뜨거운 이슈는 ‘이건희미술관’이 이어받았다. 전국 지자체의 과열 유치전을 불러왔고 지난달 초 문화체육관광부는 ‘이건희기증관’이란 가칭으로 후보지를 서울의 송현동과 용산동, 두 곳으로 압축한 상태다. 당장 국립현대미술관의 ‘이건희컬렉션’ 활용방안에도 영향을 미칠 이 사안에 대해 윤 관장은 말을 아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둘러보다 잠시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뒤로 윤호중의 조각 ‘물동이를 인 여인’(1940·왼쪽부터), 김기창의 ‘군마도’(1955), 김종태의 ‘사내아이’(1929)가 보인다. 윤 관장은 “이건희 회장은 미술사에서 중요한 작가의 작품은 대부분 사들였다”며 “시장성에 상관없이 한자리에 모아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던 듯하다”고 회고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이건희미술관이 세워지면 기증받은 작품들은 어찌 되는가.

“거기까진 논의된 바가 없다. 연내에 송현동과 용산동 중 부지를 결정할 테고 건립까진 수년이 걸릴 거다. 지금은 이건희컬렉션이란 가치를 최대한 높이고 활용할 고안만 하면 된다. 다만 ‘이건희기증관’이란 명칭 대신 그냥 ‘이건희컬렉션’이라 하는 건 어떠냐는 제언은 한 적 있다. 국가에서 짓는 건데 외래어는 좀 곤란하다고 하더라.”

―전국 지자체 다수가 미술관으로 직접 연락했다던데.

“대한민국 각 시·도의 유치경쟁 덕분에 미술관이란 말이 국민적 차원에서 친숙한 단어가 된 점은 되레 긍정적으로 본다. 어쨌든 나는 권역별로 미술관은 많을수록 좋다는 입장이다.”

윤 관장의 공식 임기는 내년 2월까지다. “코로나와 싸우느라 시간을 다 보내고 실력발휘를 못해 안타깝다”는 말이 충분히 이해가 될 만큼 지난 2년 6개월은 빠르게 지나갔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장의 ‘3년 임기’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장기계획은커녕 ‘뭘 좀 해보려면 끝난다’ ‘전임 관장이 기획한 일을 하다 보면 퇴임’이란 얘기가 나올 정도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지난해 4월 미술관의 숙원이던 관장 직급이 격상됐다. ‘임기제 고위공무원 나급(2급 국장급)’에서 ‘1급 차관보급’까지 올라선 거다(참고로 국립중앙박물관장은 1급 차관급이다). 그럼에도 윤 관장은 “겉만 우아한 백조관장”이라며 한껏 자신을 낮춘다. 이제 6개월여 남은 시점, 조심스럽게 연임의사를 묻자 “다음에 얘기하자”며 미소로 대신했다.

―‘소장품 1만점 시대’, 큰 성장이지만 자생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들 한다.

“세계 유수의 미술관 역시 주요 기증작이 채운다. 미술품 구입 예산에는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고, 기증문화가 활성화될수록 그 비중은 는다. 하지만 기증도 결국 미술관에 신뢰가 생겨야 하는 거다. 이건희컬렉션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이 ‘자생적’ 성과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서울 삼청로 서울관에서 열고 있는 ‘이건희컬렉션 특별전’을 배경으로 앉았다. 왼쪽으로 김은호의 ‘간성’(1927)이, 오른쪽으론 장욱진의 ‘공기놀이’(1938)가 보인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수장고 포화상태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나.

“1488점 기증으로 과천·청주관에 있는 수장고가 95% 찼다. 여기저기 타진은 하는데, 사실 국가 차원의 예산·인력이 필요하다. 고무적인 건 몇몇 지자체에서 관심을 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식으로 돌파구를 마련해 지역과 미술관의 상생을 모색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미술관 업무가 소장품 쪽으로 쏠린 듯하다.

“미술관 본연의 의무와 역할은 이건희컬렉션 이전과 이후가 똑같다. 사실 미술관의 격은 소장품이 말해준다. 그만큼 소장품 연구·관리가 중요하다. 소장품이 대거 증가했기 때문에 예산·인력을 배치하고 ‘비정상적 긴급사태’를 해결하려는 것뿐이다. 당장 등재작업부턴데, 우리 미술관이 소장품을 등재하는 역량은 한 해 200점 정도다. 이건희컬렉션 외에도 기증받은 500점 더 있으니, 지금 2000점 얼추 10년치를 작업하고 있는 셈이다.”

―지난 2년 반 임기 중 중요한 성과를 꼽으라면.

“한국현대미술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책으로 출판해 한글판은 국내에, 영문판은 해외로 내보내고 있다. 미술관 내 미술전문서점을 만든 것도, 전시도록을 상품화한 것도 꼽을 만하다. 연구저술은 굉장한 성과다. 세계 무대에 한국미술을 알리는 일이 늘 중요하다고 말해왔는데, 뭐든 정보를 줘야 관심을 가질 수 있지 않겠나. 도판이 풍성한 볼륨 있는 단행본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데일리와 인터뷰 중인 윤범모 국립현미술관장. 스스로를 ‘겉만 우아한 백조관장’이라고 말한 윤 관장은 “아등바등한 성격이 아니어서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사는 편”이라며 “다만 ‘수처작주’(隨處作主·어느 곳이든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는 뜻)란 말을 따라 미술관 밖이든 안이든 주인의식으로 맡은 소임을 다하려 한다”고 말했다(사진=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1951년 충남 천안에서 났다. 동국대 미술학과,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동아신춘문예에서 미술평론부문을 수상(1982)한 뒤 글 쓰는 일로 미술계에 발을 들였다. 호암갤러리 큐레이터(1984∼1986)로 전시기획을 시작했고 예술의전당 미술관, 이응노미술관 개관·운영에 참여했으며, 광주비엔날레 20주년 특별전 큐레이터(2014),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예술총감독(2016), 창원조각비엔날레 총감독(2018)으로도 활약했다. 가천대 미술디자인대 교수(1994∼2016),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2017∼2019)로 후학을 양성하며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장·한국큐레이터협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용된 이후 주요 전시로 ‘광장: 미술과 사회’(국립현대미술관 개관 50년 기념전·2019), ‘미술관에 書: 한국 근현대 서예전’(2020),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2020),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2021) 등이 꼽힌다. ‘시인과 화가’(2021), ‘백년을 그리다’(2018), ‘한국미술론’(2017), ‘나혜석, 한국근대사를 거닐다’(2011) 등 저서도 다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