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수증 엮어짜고 옛 배우 조립하고…4인4색 '기억소환법'

by오현주 기자
2019.03.18 00:12:00

선화랑 '2019 예감전: 자서전-기억수집'
작가 정혜경·구나영·최재혁·정운식 선정
자서전 주제로 제각각 모은 기록 풀어내
회화·설치작품 등 35점 내걸고 30일까지

정혜경의 ‘꽃가마’(2019). 세상의 모든 영수증으로 만든 작품이다. 직접 용접해 골격을 만든 프레임 위에 일일이 손으로 한 장씩 영수증을 짜서 엮고 붙여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한 사람의 ‘숙제’는 영수증이었다. ‘내가 살아온 일’을 돌아보니 남는 건 그것뿐이었더라 했다. 서럽더란다. “이까짓 것!” 인생의 목표처럼 모아온 그것을 태워버리자 작정을 했다. 그런데 말이다. 홀랑 타버릴 줄 알았던 그것이 제대로 타지도 못한다. 그냥 까맣게 지워질 뿐이다. 살려야겠다 싶었다. 다시 주워 한 장씩 겹쳐 짜냈다.

#2. 다른 사람의 ‘물음’은 마음이었다. 기뻤고 노여워했고 슬펐고 즐거웠던 그 감정들이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희끄무레하고 뭉개지고 엉키고 검게 그을린 그것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무가 서고 숲이 달려드는 거다. 한지를 펼쳐 먹과 아크릴로 그려나갔다.

#3. 또 다른 사람의 ‘고민’은 일상이었다. 또박또박 반복되는 내 생활의 패턴이 지루해서가 아니다. 일상을 사는 일의 의미로 만들지 못하는 누군가가 안타까웠다. 삶이란 것, 그대들이 하나씩 쌓아낸 그것이야말로 시대고 문화가 아니던가. 그래서 일상을 모으자 했다. 화사한 색감으로 차곡차곡 캔버스에 포개 얹었다.

#4. 마지막 사람의 ‘회상’은 얼굴이었다. 어디선가 봤던 시대의 아이콘을 무작정 떠올렸다. 비틀즈, 오드리 헵번, 찰리 채플린 등이 나오더란다. 하지만 정작 기억이 향한 끝은 그들 유명인이 아니었다. 그들에 얽혀 추억의 연상작용을 일으키는 ‘그이’였다. 그이를 알루미늄판에 겹겹이 박아냈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 ‘2019 예감전: 자서전-기억수집’에 나선 작가 최재혁(왼쪽부터), 정혜경, 정운식, 구나영. 전시는 ‘자서전’을 주제로 시각과 풍경, 생각과 방식이 다 다른 저마다의 기록을 첩첩이 쌓고 빚은 ‘4인4색전’으로 꾸몄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여기 네 사람이 있다. 온통 숙제고 물음이고 고민이고 회상인 자신의 삶을 제대로 한번 꺼내보자고 작정한 이들이다. 내가 직접 쓰는 내 전기, ‘자서전’을 만들어보자 했다. 다만 그들이 고른 매체는 글이 아니다. 붓으로 손으로 그리고 짜고 두들기고 칠해 만든 그림과 조각, 또 설치작품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선화랑이 ‘2019 예감전’에 어김없이 ‘예감이 좋은’ 작가들을 소개했다. ‘오늘을 내보이고 내일을 가늠하자’는 의미를 채워 2004년부터 이어온 자리다. 올해 나란히 부른 작가는 정혜경(41), 구나영(36), 최재혁(36), 정운식(35). ‘자서전: 기억수집’이란 테마 아래 35점을 걸고 세웠다. 시각과 풍경, 생각과 방식이 다 다른, 저마다의 기록을 첩첩이 쌓고 빚어 꾸민 ‘4인4색의 예감’이다.

△‘꽃가마’ 타고 ‘상상의 숲’으로 들어서니

‘영수증으로 남은 작가.’ 15년 차 주부로 사는 작가 정혜경의 작업은 여전하다. ‘영수증’이다. 물건을 사면 한 장씩 얻는 영수증을 모아 작품을 만든다. “결혼한 뒤 주부로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니 가계부와 그 위에 붙인 영수증만 남겼더라”고 했다. 그날부터였다. 제대로 타지도 못하고 애처롭게 그을어가는 영수증을 본 그날 이후. 세상의 모든 영수증을 모으기 시작했다. 일일이 손으로 한 장씩 영수증을 겹쳐 짜 ‘1억 5000만원 유니폼’ ‘1400만원 유니폼’(2018)을 만들었다. 그러곤 기어이 ‘꽃가마’(2019)까지 선뵌다. 직접 용접해 골격을 만든 프레임 위에 하나하나 영수증을 또 짜서 엮고 붙여 제작한 것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그런데 부모님을 보면서 세상을 향한 눈을 넓혔다.” 꽃가마를 태워 시집보낸 부모를 생각했던 건가. 시간이 흐르면 그 안의 내용도 사라져 아무 기록조차 되지 못하는 그 ‘영수증’이 이젠 누군가를 비추는 거울이 된 셈이다. ‘꽃가마’ 외에도 정 작가는 판화 ‘거꾸로 쓰여진 편지: 사랑하는 딸아’(2019), 나무판에 부조로 작업한 ‘물가에 내놓은 애’(2018) 등을 내놨다. 자신보다 상대를 담아내자는 마음으로 빚은 작품들이다.



작가 정혜경이 자신의 작품 ‘꽃가마’(2019) 옆에 섰다. 시간이 흐르면 그 안의 내용도 사라져 아무 기록조차 되지 못하는 ‘영수증’으로 작가는 누군가가 살아온 시절까지 엮어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구나영은 숲을 그린다. 생동감 넘치는 푸른 숲이 아니다. 달빛도 없는 어두운 밤에 들어찬 나무들이 한목소리를 내는 전경이니까. ‘삶의 노래’(2018)란 작품 앞에서 구 작가는 “삶의 무게를 묵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담담히 말한다. 80호(145.5×112.1㎝)는 훌쩍 넘길 흑백톤 화면에 느슨하게 들여세운 건 오로지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들뿐. 닮은 듯 다른 이들이 흔들흔들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미약해 보이지만 각자 치열하게 살고 있는 개인을 의미한다”고 했다. 내 자리에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눈보라가 쳐도 부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모습이라고. 맞다. 작가가 그린 건 마음의 숲이고, 상상의 숲이다. 팀북투(Timbuktu)라 부르는 이상경. 결국 구 작가는 엉킨 듯 뭉개진 그을음 같은 마음을 쏟아낸 거다. “칼춤을 한판 추고 난 듯하다고 할까. 무아지경으로 붓을 휘두르고 나면 마음이 게워지는 느낌이다.” 연작 ‘삶의 노래’ 외에도 구 작가는 별 쏟아지는 하늘과 맞닿은 어두운 땅에 큰 구멍을 낸 ‘헤아릴 수 없는 일’(2017), 캄캄한 들판에 풀 자라는 땅을 켜켜이 쌓은 ‘스펙트럼’(2017) 등을 걸었다. 그저 무겁다고만 할 건 아니다. 별이 있고 풀이 있으니. 우린 그것을 희망이라 부르지 않나.

작가 구나영이 자신의 작품 ‘삶의 노래’(2018) 곁에 섰다. 흑백톤 대형화면 가득 들여세운 나무들이 흔들흔들 움직이며 노래를 부르는 듯하다. 마음의 숲을 화면에 쏟아낸 작가는 그저 “삶의 무게를 묵직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골동품’ 그보다 더한 ‘오래된 얼굴’

새로움이 넘쳐나는 세상. 그저 소용이 다한 옛것으로 저만치 밀어둘 ‘정물’에 관심을 가진 이는 작가 최재혁이다. 예전 그 어느 때 누군가가 사용했을 법한 물건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화폭에 올린다. 이유는 이렇다. “이 모든 정물이 누군가의 삶에선 경험과 일상을 간직했던 소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선지 최 작가의 작품에는 유독 손때가 묻은 사물이 많이 등장한다. 고풍스러운 조명기구, 트랜지스터라디오, 덩치가 산만한 축음기, 수동타자기 등 흔히 ‘골동품’이라 불리는 것들 말이다. 더 특별한 건 이들 사물을 배치하는 기법. 조선시대 정조 이후 대중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책거리’나 ‘책가도’의 형태다. 연작 ‘기명과 절지’(2015)는 책만 빠졌을 뿐 영락없이 ‘8폭 병풍 책거리’ 그대로다. 그 옛날 수묵채색으로 완성했던 그것을 색색의 서양물감으로 깔끔하게 ‘꽃단장’시킨 것이 다른 점이라고 할까. 그렇다고 최 작가가 그리는 정물이 진짜 ‘골동품’인 것만은 아니다. 최근 작업한 ‘스틸 라이프’(2018) 시리즈에는 김환기의 달항아리가 든 그림액자와 잘 빠진 BMW 클래식 세단까지 등장하니까. 만만한 정물이라고 작업까지 만만치는 않다. 촬영하고 수집한 소재를 하나하나 이미지화해 컴퓨터에 저장하고 기본 레이어를 만들어 강약을 조정하고. 하지만 날이 갈수록 새것을 못 찾아 안달들이 아닌가. 왜 굳이? 최 작가는 “또 하나의 새로움을 만드는 것보다 차용하는 게 설득력 있겠다 싶었다”고 설명한다. 각각의 정물을 더욱 잘 재현하고 싶었고, 그래서 형식에 욕심을 부린 것”이라고. 하지만 결국은 조화더란다. 모아놓아 의미가 더 커졌다면 그건 단순한 배열이 아니란 얘기일 테니까.

작가 최재혁이 자신의 작품 8점 연작 ‘기명과 절지’(2015) 앞에 섰다. 예전 그 어느 때 누군가가 사용했을 법한 물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독특한 점은 이들 사물을 배치하는 기법. 책만 빠졌을 뿐 영락없이 조선시대 민화 ‘8폭 병풍 책거리’ 그대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가 정운식은 얼굴을 작업한다. 그저 늘 보아온 얼굴이려니 하기엔 단순치 않다. 보이는 얼굴은 하나지만 작업한 얼굴은 하나가 아니니. 잘라낸 알루미늄판을 수십 장 겹쳐 올린 뒤 총총히 고정핀을 박고 일일이 색을 입히는 과정까지 거쳐야 완성을 보는 얼굴이니까. 그렇게 나온 인물들은 우리가 아는 그들이 맞다. 4명의 멤버가 꽉 들어찬 그룹 비틀즈(‘아이 윌’ 2016), 영화 ‘문리버’에 출연 중인 배우 오드리 헵번(‘허-문리버’ 2018), 예의 그 호기심 어린 눈빛이 가득한 찰리 채플린(‘채플린 옐로우’ 2016) 등. 정 작가가 유독 이들의 얼굴에 매인 데는 이유가 있단다. 과거 어느 한때 이들과 함께 추억을 만들었던 누군가 때문이라고. “얼굴은 하나의 장소라고 생각한다. 결국 기억이나 추억, 타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는 작업인 거다.” 한마디로 얼굴은 영화를 같이 봤던 사람, 음악을 같이 들었던 사람을 불러내는 수단이고 도구란 소리다. 이를 위해 정 작가는 숱한 단계를 마다하지 않는다. 사진캡처, 스케치, 컴퓨터 캐드작업. 또 판 높이를 재고 재단하고 갈고 다시 조립하고. 족히 한 달은 걸리는 추억소환 작업이라고 했다.

그래, 그럴 거다. 숙제든 물음이든 고민이든 회상이든, 내 자서전에 한 줄 흔적으로 데려다 놓는 작업이 어디 쉬운 일이겠나. 비슷하다지만 결코 같지 않은 치열함으로 채우고 다져낸 기억수집법, ‘4인4색의 예감’은 30일까지다.

작가 정운식과 그의 작품 ‘러브’(2018). 시대가 기억하는 배우 오드리 헵번의 얼굴을 과거 어느 한때 스타와 함께 추억을 만들었던 누군가에 오버랩했다. “얼굴은 하나의 장소라고, 결국 기억이나 추억, 타인의 감정이 들어가 있는 작업”이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운식의 ‘채플린 옐로우’(2016). 배우 찰리 채플린이 출연한 영화의 한 컷이다. 잘라낸 알루미늄판을 수십 장 겹쳐 올린 뒤 총총히 고정핀을 박고 색을 입혀 완성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