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성 보장되지 않는 '中企 익명제보신고센터'
by채상우 기자
2015.06.22 03:00:00
개별 기업 사례는 익명성 보장 안돼
전문 직원 부재..제대로 된 대응 불능
[이데일리 채상우 기자] 대기업에 특수소재 원료를 납품하고 있던 경기도 시흥에 있는 A기업 김 모 대표는 최근 대기업의 일방적인 대금지급 지연 횡포에 시달리다 못해 공정거래위원회에 이를 신고하려 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의 사례로는 익명성 보장이 어렵다는 공정위의 설명에 신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신고를 시도했다는 소식이 대기업에 들어가면서 대기업과의 거래마저 단절되고 말았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중소기업을 위해 마련된 신고시스템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일각에서는 현재 설치·운영중인 신고시스템이 전형적인 ‘전시행정’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납품단가 인상 요구를 하지 않는 이유. 자료=중소기업중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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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이 대금지급 지연, 납품단가 부당인하 등의 횡포를 일삼아도 이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원청업체인 대기업과의 거래 단절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 8일 중소기업중앙회가 발표한 ‘중소제조업 납품단가 반영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26%가 대기업과의 거래가 끊기는 것이 두려워 납품단가 인상을 요구하지 못한다고 응답했다.
지난해 11월 ‘대형마트 거래 중소기업 애로 실태조사’에서는 응답기업의 49.3%가 ‘신고자 비밀 보장’을 불공정거래 대책에서 가장 시급하게 보완할 점으로 꼽았다. 신고자의 정보가 노출되면 거래 단절이라는 대기업의 보복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지만 정부의 대처 방안은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공정위는 중기중앙회와 중기중앙회 소속 일부 조합들과 함께 지난 1월부터 익명제보센터 설치·운영을 시작했다. 중기중앙회와 중기중앙회 소속 15개 조합 그리고 대한전문건설협회 등 17개 기관에서는 지난해 10월부터 ‘하도급불공정 신고센터’라는 이름으로 익명제보센터를 운영했다.
중기중앙회와 15개 조합, 대한전문건설협회는 신고되 내용을 공정위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대리 신고 방식을 이용해 익명성을 보다 안전하게 보장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해 각 조합과 중기중앙회를 통한 신고시스템을 도입하게 됐다”고 밝혔다.
익명제보센터가 운영된 지 9개월이 지났지만 지난 19일 현재 익명제보센터를 통해 적발된 불공정거래는 전무하다.
익명제보센터에 대한 중소기업들의 신뢰도도 낮은 수준이다. 중기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53.7%가 익명제보센터를 이용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익명제보센터가 익명성을 보장해 줄 수 없을 것이라는 불신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울산에서 조선업체에 부품을 납품하고 있는 B기업 관계자는 “신고센터가 아무리 익명성을 보장한다고 해도 대기업들은 어떻게든 신고한 기업을 찾아내는 것이 현실”이라며 “단순한 시스템으로 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지극히 순진한 생각”이라고 지적했다. 익명제보센터를 운영하는 플라스틱조합 관계자는 “업체들이 익명제보센터에 대해 처음에는 솔깃해 하다가도 그 내용을 자세히 말하면 모두 고개를 내젓는다”며 상황을 설명했다.
익명제보센터 운영기관조차 익명제보센터시스템의 허술함을 인지하고 있다는 게 더 큰 문제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현재 익명제보센터는 특별한 시스템이 아닌 이메일을 통해 불공정거래 내용을 받아 보는 수준에 불과하다”며 “조합에 따라 담당 직원이 없어 헤매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개별 기업이 신고를 할 경우에는 처음부터 익명성을 보장해 줄 수 없다는 무책임한 태도까지 보였다. 공정위 관계자는 “개별기업이 신고를 할 경우 내용이 드러날 수 있기 때문에 익명성을 보장해주기가 힘들다”며 “중기중앙회나 조합을 통해 개별기업의 불공정 사례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답했다.
대기업의 횡포로부터 중소기업을 보호해야 할 정부의 안일한 태도에 중소기업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뚜렷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익명제보센터를 좀 더 홍보하고 메일이 아닌 전용 페이지를 만들어 접수하는 방식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