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손실이 있는데, 없습니다?”…망가진 대체투자, 평가도 엉망

by지영의 기자
2024.02.05 05:00:00

[공정가치평가의 민낯]
국내 공적자금 굴리는 기관들, 공정가치평가 등한시
손실난 투자건, 모조리 장부가 처리...“폭탄 돌리기·모럴해저드”
합리적 공정가치평가 가이드라인 부재
“당국이 관리 손 놓은 탓, 자본시장법 손질해야”

[이데일리 마켓in 지영의 기자] 국내 기관투자자(LP)들이 대체투자자산 공정가치평가시 기준을 입맛에 맞게 선택하면서 수익률을 실제보다 부풀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자본시장 위축으로 부동산 등 대체투자 자산가치가 폭락하고 부실화됐음에도 과거 투자 시점의 가격(장부가)을 그대로 적용해 손실을 숨기는 사례가 적지 않은 모양새다. 특히 공적 자금을 굴리는 기관의 경우 부실이 심각해질 경우 세금으로 이를 보전해줘야 하기에 장부가 남용을 막아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시장 전문가들은 정부와 금융당국이 제대로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지 않은 것부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근 10여년간 지속된 저금리 시기에 국내 공적 기관들의 대체투자 규모가 수백조원대로 급격히 늘어나는 동안 합리적인 평가 체계 조성과 관리에 손을 놓고 있었다는 비판이다.

4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국내 연기금과 공제회 등 공적 자금을 운용하는 기관투자자 중 대체투자자산 공정가치 평가 규정에 우선 순위를 명시한 곳은 국민연금과 사학연금 등 극히 일부 뿐이다. 두 기관의 경우 공정가치평가 원칙에 ‘시장에서 얻을 수 있는 객관적인 정보’를 적용하도록 규정에 명시하고 있다. △시장성이 있는 경우 시장가 △시장성이 없는 경우 독립적 제3자와의 거래가격 △기타 공정가치 추정 모형 순으로 적용하도록 하는 것이 요지다. 자산평가 기준에 명확한 우선순위를 둬 취득원가(장부가) 채택을 지양하고 합리적인 가격을 산정하기 위한 최소한의 원칙을 마련해둔 셈이다.

이들 기관 외에 대부분의 기관투자자들은 구체적인 공정가치 평가 규정을 갖고 있지 않다. 실무적인 차원에서 공정가치평가를 부분적으로 도입해 적용하고는 있으나, 체계적으로 이뤄지는 곳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특히 일부 공제회들의 경우 시가가 없는 자산들에 대해 공정가치평가를 아예 진행하지 않는 곳도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공정가치평가를 형식적으로 진행하거나 배제하는 분위기가 만연한 까닭에 기관투자자들의 부실 반영은 계속 이연되는 모양새다. 대부분의 기관투자자들이 부실화된 자산을 장부가로 처리하는 곳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특히 해외부동산 투자건 중 시장 감정가격이 50% 넘게 폭락하고 기한이익상실(EOD) 및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로 빠진 부동산 투자 평가액을 손실처리 하지 않고 원가로 기재하는 사례가 상당하다. 자금회수를 못할 것이 불보듯 뻔한 건임에도 손실 반영을 최대한 미룬다는 이야기다.



한 공제회 관계자는 “기관별로 손실 반영 부담이 커서 장부가로 두는 건들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며 “그렇지만 공정가치평가를 하지 않는다고 잘못됐다고 말하긴 어렵다. 시장 변동성이 높은 시기에는 계속 가치평가를 해서 자산가격 매해 바꾸는 게 무의미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대체투자 공정가치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투자 자산 실태를 관리하고 예측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대체투자는 전통적인 투자 자산군인 주식·채권과 달리 명확한 기준 가격이 없다. 개별 평가를 진행하지 않으면 시장 변동에 따른 자산 건전성 실태를 파악할 수 없다. 연기금과 법정공제회는 자금의 공적 특성상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법적으로 명문화돼 있다. 부실 관리를 제때 못해 문제가 생기면 그만큼 정부의 보조금, 즉 세금으로 메우게 된다. 투자 리스크관리에 구멍이 없도록 더 엄격한 평가관리가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자산평가업계에서는 기관투자자들이 공정가치평가를 등한시하는 원인으로 자본시장법 및 시행령의 비합리성을 꼽는다. 국내법 자체가 장부가 기재를 방임하고 있기에 기관들이 대체투자 자산 현황을 합리적으로 평가할 유인이 적다는 비판이다. 집합투자재산의 평가방법을 규정하고 있는 자본시장법 제 238조 및 시행령 제 260조는 신뢰할만한 시가가 없는 자산에 대해 △취득가격 △거래가격 △채권평가사 및 신용평가사, 회계법인 등 제3자 평가기관이 제공한 가격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세 가지 방법에 대해 우선순위를 지정하지 않아 손실을 숨기고 싶은 기관들이 장부가 처리를 남용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현행법 자체가 아전인수를 허용하는 상황으로 극히 비합리적”이라며 “우선순위 없이 여러 평가법을 허용하면 대다수의 투자자들이 유리한 쪽을 고를텐데 손실 나면 장부가를 가져다 쓰고 이익이 날 땐 거래가격을 쓰고싶지 않겠나”라고 지적했다.

한 자산평가회사 관계자는 “대형 연기금의 경우 자체 규정에 공정가치평가 우선순위를 정해두고 그에 따라 평가를 진행하고 있다”며 “자본시장법 시행령에도 자의적인 평가를 배제할 수 있도록 이같은 우선순위 권고 규정을 반영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