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전재욱 기자
2017.08.20 06:00:00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성년후견인은 정신적 판단력이 달리는 사람 곁에서 권리 행사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 친족이 하는데 변호사나 법무사 등 전문가가 맡는 경우도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이 이 제도의 수혜자다. 자산을 적절하게 쓰도록 돕는, 즉 은행 업무를 대신하는 것이 성년후견인 역할에서 큰 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비대면 거래가 허용되지 않는데다 은행마다 업무 절차가 제각각이어서 볼멘소리가 나온다. 금융사고 예방도 중요하지만 고령화로 성년후견인이 계속 늘어나는 만큼 절차를 간소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7일 법조계에 따르면 성년후견인 상당수는 은행 업무를 보기 위해 반드시 은행 영업점을 방문해야 하는 상황이라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은행에서 비대면 거래를 제한한 탓이다. ‘디지털 금융’ 시대에 ‘전표 거래’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대표적인 비대면 거래인 인터넷뱅킹 신규 거래를 허용하는 시중은행은 없다. 원래 쓰던 인터넷뱅킹이 있으면 기능을 정지한다. 성년후견인 절차가 시작되면 당사자 계좌를 동결하는 탓에 자연스러운 절차다. 때문에 연동돼 있던 체크카드 사용도 금지된다. 일부 은행은 체크카드를 다시 쓰도록 허가하거나 새로 발급하지만 그렇지 않은 은행이 더 많다. 자동이체도 허용하지 않는 곳이 다수다. 약 30건의 성년후견사건 업무를 하는 송인규 변호사는 “성년후견인들끼리 우스갯말로 ‘비대면 거래 허용하는 은행 생기면 자산을 모두 옮길 것’이라는 말도 한다”고 전했다. 실제로 김 법무사가 그랬다.
은행이 성년후견인 비대면 거래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금융사고 예방 차원이 크다. 예컨대 성년후견인이 인터넷뱅킹으로 대출을 일으켜도 막을 방법이 없다. 법원은 이런 우려를 고려해 성년후견인의 인터넷뱅킹 신규 개설을 기각한 적 있다. 다만, 기술적 문제인데 은행이 해결하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인터넷뱅킹에서 입출금 정도만 허용하고 대출 등 다른 업무는 막는 등 선별적으로 기능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금융거래는 당사자 거래가 원칙이라서 성년후견인에게 예외를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전자금융거래법상 접근매체(인터넷뱅킹)를 허용하려면 본인 확인을 거쳐야 한다. 체크카드도 비슷하다. 그러나 정신적 판단력이 달리는 피성년후견인이 창구를 방문해서 자신의 의사를 밝히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김 법무사는 “당사자 정신이 맑으면 내가 업무를 대신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문제는 은행 업무 방식이 들쑥날쑥 이라는 것이다. 앞서 김 법무사 사례에서 A 은행과 B 은행이 그랬듯이 어디 은행은 되고 다른 데는 안 되고 식이다. 업무처리 방식이 다른 이유는 마땅한 기준이 없어서다. 금융당국이 적극적으로 나서 지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후견인들은 말한다. 아울러 제도에 대한 은행의 인식도 낮은 편이다. 은행 창구를 찾아가면 성년후견인제도가 무엇인지부터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
이에 대해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이 법원 판단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금융사고 위험이 상존하기 때문”이라며 “유연하게 대응하다가 자칫 은행이 법원 권한을 넘어서까지 업무를 처리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고령화 추세 속에서 성년후견인은 계속 늘 전망이다. 법원에 따르면 제도를 도입한 2013년 후견인 접수는 414건이었으나 지난해 2330건으로 늘었다. 지난달까지 누적 접수 건수는 6875건이다. 사건을 담당하는 김성우 서울가정법원 부장판사는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은행 업무의 번거로움을 호소하는 성년후견인이 상당하다”며 “은행이 기술적으로 업무 환경을 개선하면 장기적으로 제도 정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