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대생은 죽었는데…22년째 ‘거리 활보’하는 살인범[그해 오늘]
by이로원 기자
2024.05.31 00:00:35
‘부산 태양다방 여종업원 살인사건’ 용의자 양 씨
사건 발생 15년만에 ‘공소시효 폐지’로 잡혀
1·2심 피의자에 ‘무기징역’ 선고했지만
대법 무죄 선고 “유죄 인정시 ‘한 치의 의혹’도 있어선 안돼”
양 씨 외 뚜렷한 용의자 아직 無…장기미제 가능성
[이데일리 이로원 기자] 여대생이 살해당했는데 22년째 ‘죽인 범인’은 없고 사건의 ‘유력 용의자’만 남았다. 2002년 5월 31일, 부산 강서구 명지동 해안 안벽에서 20대 여성의 시체가 떠올랐다. 피해자는 당시 22세로 학비를 벌기 위해 부산 사상구 ‘태양다방’에서 일하던 A씨였다. 마대자루에 담겨 있던 시신은 옷가지가 벗겨진 채 손과 발목, 무릎이 청테이프로 묶여 있었다. 흉복부를 비롯해 팔·허벅지 등 수십 군데가 흉기로 난자당한 상태였다. 성폭행 흔적은 없었다. 한일월드컵 개최로 나라가 들썩거렸던 2002년 5월, A씨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 2002년 부산 강서구 명지동 해안 안벽에서 다방 종업원의 시신이 담긴 마대자루가 발견됐다. (사진=부산경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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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5월 21일 밤 10시에 퇴근해 곧장 집으로 향한 A씨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A씨 언니는 동생을 찾아 나섰지만 행방을 알 수 없었다. A씨 언니는 사건 발생 9일 뒤인 5월 30일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이튿날인 5월 31일 마대자루에 담긴 A씨 시신이 명지동 해안가 안벽에 떠올랐다. 부검 결과 사망 추정 시각은 실종된 다음 날인 5월 22일 새벽 4시께였다.
사건 초기부터 양 씨는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양 씨는 A씨가 실종된 다음 날인 5월 22일 낮 12시 10분께 사상구의 한 은행을 찾아 A씨 통장에서 296만 원을 인출했다. 빨간 모자를 쓰고 온 양 씨의 모습은 은행 CCTV에 그대로 잡혔다. 양 씨는 은행 ATM에서 현금 인출을 시도하지만 비밀번호 오류로 두 번 실패했다. 은행 밖을 나갔다가 3분 뒤 돌아와 ATM에서 맞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잔액을 확인한 양 씨는 은행 창구로 가서 낮 12시 18분에 현금을 찾았다.
며칠 뒤 양 씨는 자주 가던 술집을 찾았다. 양 씨는 종업원 B씨에게 A씨 신분증과 적금통장을 건네며 은밀한 제안을 했다. 대신 A씨 적금통장을 해지한 뒤 돈을 찾아오면 일정 부분을 나눠주겠다고 한 것. 공교롭게도 종업원 B씨는 피해자 A씨와 외모가 닮아 있었다.
종업원 B씨는 동료 직원 C씨와 함께 6월 12일 오후 2시쯤 은행으로 향했다. 그리고 신분증을 제시해 비밀번호를 바꾸는 수법으로 A씨 적금통장에서 돈 500만 원을 찾았다.
양 씨와 양 씨를 도와 돈을 찾았던 B, C씨는 이후 자취를 감췄다. CC(폐쇄회로)TV 영상 기록이 있는 만큼 범인을 비교적 쉽게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예상됐다. 하지만 영상은 흐릿했고, 그 이외 단서가 나오지 않으면서 사건은 미제로 남았다.
| 2002년 5월 22일 살인 피해자의 통장에서 출금하는 피의자 양 씨. (사진=부산경찰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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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2015년 8월 살인사건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사소송법 개정안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태양다방 사건의 공소시효는 완전히 사라졌고, 부산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은 재수사에 들어갔다.
경찰은 유력 용의자 양 씨의 수배 전단을 뿌리는 등 끈질긴 수사 끝에 결국 2017년 8월 양 씨를 검거했다. 사건 발생 15년 만이었다. 양 씨는 사건 초기부터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에 검거된 양 씨는 강도 혐의는 인정하지만 A씨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양 씨는 A씨가 실종된 5월 21일 오후 8시 사상역에서 신분증과 통장, 수첩 등이 든 A씨 가방을 주웠다고 설명했다. 양 씨는 발각되더라도 단순 강도 혐의로 처벌이 미약할 거라 판단하고 통장 비밀번호를 유추해 돈을 찾았다고 말했다.
처음엔 피해자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조합해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냈다던 양 씨는 말을 바꿔 피해자가 수첩에 써둔 부모의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조합해 통장 비밀번호를 우연히 풀었다고 설명했다. 처음 돈을 뽑고 나서도 아무 일이 없자, 술집 종업원 B씨에게 A씨의 적금을 찾아오라는 추가 범행을 제안했다고 답했다.
당시 A씨 통장의 비밀번호는 ‘6X6X’이었다. 6이 두 번 포함됐다. 하지만 양 씨가 조합했다는 A씨 부모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엔 숫자 6이 들어있지 않았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이를 두고 양 씨가 A씨를 협박 또는 폭행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지난 2019년 양 씨는 무죄가 확정됐다. 1심과 2심 재판부는 양 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지만 대법원은 무죄 취지로 재판을 부산고등법원에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범죄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데 한 치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양 씨가 A씨의 통장에서 돈을 뽑았다는 이유로 A씨를 죽였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또 재판부는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각은 5월 22일 새벽 4시이고, 용의자 양 씨가 돈을 인출한 시각은 같은 날 낮 12시 18분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만약 양 씨가 피해자로부터 통장 비밀번호를 알아냈다면 불과 8시간 만에 비밀번호를 기억하지 못해 두 번이나 틀릴 이유가 없다고 봤다. 심증은 있으나 범행에 사용된 흉기 등 직접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간접증거의 유죄증명력이 약하다고 본 것이다.
결국 부산고법 형사1부는 2019년 7월 양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그 해 10월 23일 양 씨의 무죄를 확정했다.
사건 유력 용의자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 셈이다. 양 씨 외엔 뚜렷한 혐의점을 가진 용의자가 없었던 만큼 ‘태양다방 종업원 살인사건’은 장기 미제사건이 될 가능성이 크다.
사건을 수사한 부산경찰청은 아쉬움이 큰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부산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 관계자는 “증거 인정을 이렇게 엄격하게 하면 장기 미제 사건을 해결하기 점점 어려울 것”이라며 “다른 미제사건의 용의자들이 이번 판결을 보고 무죄로 풀려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