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한 방울로…" 돈·권력·언론이 부추긴 10조 사기극

by오현주 기자
2019.04.10 00:12:00

''실리콘밸리 사상 최대 사기극'' 폭로
"피 한 방울로 수백 가지 질병 진단"
정·재계 투자, 언론 퍼나르기 잇따라
의혹품은 비리추적, 성공신화 마침표
▲배드 블러드|존 캐리루|468쪽|와이즈베리

2014년 ‘포브스 400’(왼쪽)의 표지를 장식한 테라노스의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즈.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400인을 발표한 특별판에 등장했다. 숭배하던 스티브 잡스처럼 늘 입고 다녔다는 검은 터틀넥 차림이다. 같은 해 ‘포천’ 역시 ‘피에 굶주린 CEO’란 헤드라인으로 홈즈를 표지에 세웠다. 언론이 부추긴 왜곡된 신화였다(사진=이데일리DB).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사기. “이익을 취하기 위해 ‘나쁜 꾀’로 남을 속임”이란 뜻이다. 그런데 여기 좀더 과격한 사기가 있다.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나쁜 피’로 남을 속임.”

시작은 이 한 문장이었다. “집에서 직접 피 한 방울만 뽑으면 수백 가지 건강검사를 할 수 있다.” 어떤가. 대단하지 않은가. 아마 혁명이란 것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세상을 뒤집는 혁신 혹은 변혁, 기성을 초월하는 파격 혹은 쇄신. 다만 피를 부르는 유혈혁명인 건 맞다. 최소한 한 방울은 내놓으라고 하니까. 까짓 이쯤이야. 기꺼이 짜줄 용의가 있다. 게다가 의도가 착하기까지 하니. 가장 편리하고 가장 저렴하게 질병과 싸워 아픈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하질 않나.

이 엄청난 생각은 젊은, 아니 차라리 어리다 할, 한 스타트업 창업자의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런데 더욱 엄청난 건 그저 아이디어 차원으로 한번 던져보고 만 것이 아니었다는 거다. 실제 그이의 스타트업이 ‘파격적이고 착하기까지 한 피 한 방울’의 아이디어를 현실로 옮겨낸 것이었으니까. 미세바늘로 고통 없이 혈액을 채취하는 접착형 패치에서 나온 결과를 주치의에게 전달한다, 누가 이 꿈을 마다하겠는가. 그런데 이 모두가 사기였다? 그것도 한때 실리콘밸리의 별이라 불린, 마냥 믿고만 싶었던 젊고 매력적인 여성 창업자가 꾸민 주도면밀한 사기극이라고?

책은 ‘실리콘밸리 사상 최대 사기극’이란 타이틀을 가진 사건의 전말을 폭로한 탐사스토리다.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거대한 사기극을 무너뜨리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 과정인지. 그 험한 일을 자처한 이는 저자 존 캐리루. 월스트리트저널 탐사보도 전문 저널리스트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했다는 경력이 따라붙는다.

△실리콘밸리 농락한 ‘나쁜 피’

엘리자베스 홈즈라고 했다. 미국 스탠퍼드대를 다니다 때려치운 열아홉 살, 첨단 의료기술을 베이스로 한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했다. ‘치료’(therapy)와 ‘진단’(diagnosis)이란 단어를 조합했단다. 2003년이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홈즈는 회사명에 걸맞은 ‘휴대용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발표한다. 손가락 끝에서 채혈한 피 몇 방울로 200여가지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거였다. 뉴스가 뜨자마자 뜨거운 반응이 솟구쳤다. 각계각층 유명인사들이 열화와 같은 지지를 보내기 시작했으니. 2년도 채 안 돼 홈즈가 투자받은 금액은 600만달러(약 68억원). 테라노스는 실리콘밸리가 낳은 가장 자랑스럽고 가장 잘 나가는 최고의 스타트업 기업으로 이름을 올리게 됐다.

그저 그들만의 경사도 아니었다. 비싼 의료비에 시달리던 미국민까지 열광적으로 성원을 보냈다. “숭고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왜 아니겠나. 싸고 간단하게 만병통치를 할 수 있는 진단법이라니, 도대체 시간과 비용을 얼마나 줄였다고 말할 수 있겠나. 거기에 말이다. 판이 큰 사기극일수록 ‘산적 같은 외모’로는 한계가 있는 법. 홈즈는 연예인급 스타성이 있었다. 매력적인 외모에 독특한 언술, 주변을 휘어잡는 리더십까지 두루 갖췄으니. 단숨에 ‘제2의 스티브 잡스’ ‘여자 스티브 잡스’란 별칭이 따라붙었다.



자, 다음으로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상상하는 그대로다. 돈이 붙기 시작했다. 미국 최대 잡화·식품·건강보조품 판매업체인 월그린이 투자를 선언했다. 이어 미국 대표 슈퍼마켓 체인인 세이프웨이가 접근했고. 매장만 수천 개에 달하는 이들 기업이 테라노스와 공급계약을 하자고 덤벼든 거다. 결정적으론 미국 군대다. 이 진단법을 여기보다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을 데도 없어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상승세란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거다.

어디 이뿐인가. 성공에는 그보다 더 부풀린 신화가 따라다니는 법. 그 소임은 정·재계 권력층이 기꺼이 맡아줬다. 벤처투자자 도널드 L 루커스의 후원과 인맥이 동원됐고, 해군 출신 정치인 제임스 매티스, 미국 대표 외교관 조지 슐츠, 정치가 헨리 키신저가 차례로 나섰다. 마무리 주자는 미디어재벌 루퍼트 머독. 1억 2000만달러(약 1370억원)로 ‘성공신화’에 바람을 넣었다. 아주 빵빵하게. 한 가지 더. ‘피 한 방울 신화’를 완결한 조력자, 언론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을 터. 아무 의심 없이 수많은 언론이 그 환상적인 스토리를 퍼나르기 시작한 거다. 이 모두에 힘입어 2015년 테라노스의 기업가치는 8억 7500만달러(약 10조원)를 찍게 된다.

△대형사기극에는 공식이 있다…돈·권력·언론

현대의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아해 했을 법한 지점. 극소량의 혈액으론 의미있는 검사결과를 낼 수 없단다. 아직까진 말이다. 같은 피라 해도 결과가 왔다갔다 할 만큼 불안정하다는 거다. 다시 말해 홈즈의 진단법이란 건 단순히 결과를 뽑아낸다는 차원을 지나 한계를 뛰어넘어야 했단 얘기다. 어차피 안 되는 일이니 방법은 조작뿐. 검사결과를 포장하고 투자자용 제품시연은 만들어둔 걸로 대체했다. 여기에 극도의 기밀유지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한 그 드라마에 제동을 건 이가 바로 저자다. 발단은 한 점 의혹이었다. 수년 간 기술 결함을 감추고, 다른 회사의 기기를 몰래 이용하고, 문제제기를 하는 직원은 즉시 해고하고, 입단속용 비밀유지서약에 서명하라는 강요까지. 소소한 한 점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데는 전 테라노스 직원 60명을 포함해 내부고발자 160여명과 긴밀히 진행한 인터뷰가 바탕이 됐다고 했다.

책은 또 한 편의 사기극을 세상에 꺼내놨다. 흥미로운 캐릭터에 잘 짜인 각본이 살아 있는. 늘 그랬듯 필요충분조건을 완벽하게 갖췄단 얘기다. 예나 지금이나 대형사기극에는 나름의 공식이 있으니까. 실제 사기꾼은 자리만 펼칠 뿐, 돈과 권력이 들러붙고 언론이 부추긴다. 조연은 절박한 대중. 간절함이 클수록 격하게 매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수없이 반복되는 그 공식에 왜 또 속을 수밖에 없나. 독일 나치 선전장관을 지낸 파울 요제프 괴벨스(1897∼1945)의 말은 어쨌든 유효하다. ‘대중은 작은 거짓말보다 큰 거짓말에 잘 속는다’고 했더랬다. 이뿐인가. 신뢰하는 만큼 속고, 욕망이 강해 속고, 불안해서 속고.

15년 만에 10조원 가치를 0원으로 만든 ‘몰락의 드라마’가 어떤 경각심을 일으켰을지 알 수는 없다. 짐작할 수 있는 점은 지금도 어디선가 또 다른 사기극이 벌어지고 있을 거란 것. 다만 하나는 건지고 가자. 세상은 아직도 기술보단 사람이란 것. 내부고발자란 낙인을 마다하지 않은 160명, 온갖 협박과 감시에도 꿈쩍하지 않았다는 단 한 명의 기자가 결국 거대한 판을 깨버리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