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구의 PD열전]'쩐의 전쟁' 장태유 PD "외환위기 아니었다면.."

by김은구 기자
2007.06.18 01:12:30

▲ SBS '쩐의 전쟁'의 연출자 장태유 PD(사진=김정욱 기자)

[이데일리 김은구기자] 1997년 말 찾아온 IMF 경제위기는 숱한 사람들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숱한 기업들이 외환위기에 직면해 쓰러져갔고 이로 인해 수많은 실업자가 생겨났다. 사회 진출을 앞둔 대학생들도 일자리가 없어 취업대란을 겪었다. 덕분에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직업을 선택해야하는 사람도 많았다.

'쩐의 전쟁'의 연출자 장태유 PD(36)도 그렇게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들 중 하나다. 가가 대학시절 꿈꾸던 직업은 CF 감독. 그런데 IMF사태가 터지면서 광고기획사들 대부분이 신입사원 채용을 보류했다. 낙담했던 장태유 PD는 형인 SBS 예능국 장혁재 PD의 권유로 방송사 PD 시험을 봤고 합격했다.

출발은 비록 자신의 뜻과 달랐지만 지금 장태유 PD는 후배들이 부러워하는 스타 PD가 됐다. 요즘 최고의 인기 드라마로 시청률 40%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쩐의 전쟁’이 그의 손에서 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에 만약이란 가정을 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은 없다고'고 하지만, IMF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쩐의 전쟁’을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쩐의 전쟁’ 방영 초반 시청자들에게 색다른 재미를 선사했던 것 중 하나가 ‘사자성어 놀이’다. 언뜻 머리에 떠오르는 사자성어 두 개를 물어보는데 첫 번째 것은 인생관, 두 번째는 애정관을 뜻한다.

어느날 장태유 PD는 ‘쩐의 전쟁’ 극본을 맡은 이향희 작가에게 이 질문을 받고 얼떨결에 ‘타산지석’과 ‘용두사미’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생각해 보면 정말 자신의 인생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2005년 ‘불량주부’로 연출 데뷔를 했고 ‘101번째 프러포즈’, ‘쩐의 전쟁’까지 드라마 3편을 연출했는데 모두 원작이 있어요. 남의 것을 갖다 쓰니 ‘타산지석’이죠. 결혼을 할 때까지 연애를 제대로 못했으니 애정관은 ‘용두사미’가 맞는 것 같고요.”

장태유 PD는 사자성어에 대한 자신의 답 중 하나인 ‘용두사미’ 때문에 걱정도 된다고 했다. 현재 자신과 사랑에 빠져있는 ‘쩐의 전쟁’이 초반 빠르게 시청률 상승세를 탔지만 ‘용두사미’의 뜻처럼 마지막에 추락하면 어쩌느냐는 것이다.

“원작이 있는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재미의 포인트를 미리 알고 있어 출발이 편한 장점이 있지만, 초반 4회가 넘어가면 새 이야기를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편한 것도 끝나요. 과거에도 4회까지 가장 안정적이었고, 그 뒤부터는 늘 뭔가 엉성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는 안 그러려고 신경쓰고 있죠. 한 번은 책임프로듀서(CP)로 있는 선배가 ‘너 그러면 4부작짜리 PD가 된다’는 농담도 하던 걸요.”
 
▲장태유 PD가 연출한 SBS '쩐의 전쟁'



‘불량주부’와 ‘쩐의 전쟁’의 소재는 사회적으로 일반화되어 있지만 사람들이 그 사실을 쉬쉬하며 겉으로 드러내기 꺼리는 것들이다.



‘불량주부’는 아내를 직장에 내보내고 살림하는 남편의 이야기를 다뤘고 ‘쩐의 전쟁’은 어두운 세계의 일로 치부되는 사채가 소재다.

“특별히 사회적으로 터부시되는 소재만 찾으려고 한 것은 아니에요. 너무 일상적이어서 사람들이 잘 깨닫지 못하지만 아이러니가 있는 상황이나 현실과 뗄 수 없는 문제가 드라마에 적합한 소재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장태유 PD가 이런 소재를 가진 드라마를 통해 어떤 답을 제시해 주려는 것은 아니다. '드라마는 시청자들에게 문제의식을 던져주면 된다'는 게 장태유 PD의 생각이다. 답은 시청자들이 각자 찾는 것이다.

‘쩐의 전쟁’도 마찬가지다. 장태유 PD는 이 드라마를 통해 애써 ‘사채는 무조건 나쁘다’, ‘사채업자의 협박에 어떻게 대응하라’ 는 식의 결론을 전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는 "사채업자뿐 아니라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려간 사람도 때론 가해자의 입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되짚어 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사채업자는 나쁘고 그들에게 돈을 빌렸다가 피해를 본 사람들은 무조건 좋은 사람들일까요? 돈은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소중할 텐데 갚지 않다가 사채업자가 결국 나쁜 짓을 하도록 만들기도 하잖아요.”
 
▲ 영화 연출을 하고 싶다는 SBS '쩐의 전쟁'의 장태유 PD(사진=김정욱 기자)




장태유 PD는 유독 오래, 그리고 자세히 드라마를 촬영하기로 악명(?)이 높다. 영상에 대한 욕심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장태유 PD는 “제가 산업디자인을 전공해서 그런가 봐요. 어떤 각도와 사이즈로 장면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전달력이 달라지거든요. 결국 장면이 주는 힘을 극대화하기 위해 같은 장면을 여러 차례 찍는 거죠”라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장태유 PD는 최근 재미있게 본 드라마로 MBC ‘하얀거탑’을 꼽았다. 장면을 많이 커트하며 찍은 화면들이 보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하도록 만들어줬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컷의 영상이 가진 힘을 믿고 정성을 기울이는 스타일 덕분에 장태유 PD는 항상 촬영 시간이 부족하다. 보통 10 장면 정도 찍어야 함에도 8 장면 정도 촬영을 하면 어느새 해가 지기 일쑤고, 밤을 새야 하는 일도 다른 PD보다 많다. 장태유 PD는 “내색은 안하지만 아마 저를 싫어하는 배우들도 많을 걸요”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