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식가의 세계] 미식학의 개척자, 다이어트를 말하다

by강경록 기자
2025.01.10 00:00:02

''미각의 생리학'' 저자, 장 알텔름 브리아-시바랭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겸 음식문화평론가] 인류의 역사는 음식의 변천사이기도 하다. 우리의 밥상은 이미 과거의 밥상이 아니다. 조선 후기의 기록에 성인 남자는 7홉(약 420g)의 쌀로 한 끼 밥을 지어먹었다고 한다. 요즘 공깃밥의 두 배 규모다.

예종석 한양대 명예교수
예부터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고 했지만 이젠 달라졌다. 최근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은 집계가 시작된 1963년 이후 최저치를 기록했다. 요즘 사람들은 한 끼에 평균 밥 반 공기 정도로 버티고 있다. 반면 돼지, 소, 닭고기 등 3대 육류 소비량은 지난해 기준 1인당 60.6㎏으로 쌀 소비량을 넘어섰다.

우리 경제의 산업화는 외식 산업의 발달과 함께 식생활의 서구화를 가져왔다. 20년 전만 해도 식탁에서 볼 수 없었던 브로콜리, 셀러리, 파프리카가 등장하고 식당에선 부대찌개, LA갈비와 같은 정체가 모호한 음식들이 팔리고 있다. 인스턴트 식품과 배달 음식의 소비도 날로 늘어가고 있다.

한 시대의 음식문화 발전에는 항상 그러한 변화를 주도하는 인물이 존재한다. 그들은 새로운 식재료와 요리법을 개발하고, 그것을 즐기며 평가하는 사람들이다. 편리한 식기와 식탁예절을 도입하는 것도 그들의 몫이었다. 오늘날의 음식문화를 만든 이들이 누구이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브리야 사바랭은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고 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아볼 때다.

‘미각의 생리학’에 들어간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의 초상 (사진=켈빈 스미스 도서관)
◇금수저로 태어난 ‘브리야-사바랭’

인간이 글귀 하나로 유명해지기는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을 본인은 알지도 못하는 가운데 수월하게 이루어낸 사람이 있다. 그는 바로 장 앙텔므 브리야-사바랭(Jean Anthelme Brillat-Savarin, 1755년~1826년)이다. 그는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라는 글귀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그의 명언은 200년이 지난 지금도 빈번하게 인용되며 때로는 그 의미가 본인이 의도한 바와는 상당히 다르게 왜곡되기도 한다. 여러 분야의 필자들이 용도에 따라 나름의 해석을 붙여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브리야-사바랭은 이 문구가 들어 있는 책 ‘미각의 생리학’이 세상에 나오고 두 달 뒤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 책에 상당한 애착심을 가졌고, 그 가치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책이 미식 담론의 경전으로 세계의 독자들이 애독하고 있는 걸 보면 그의 기대는 실현되었다 할 수 있겠다.

브리야-사바랭은 프랑스 남동부, 뷔제 지방의 벨레에서 태어났다. 벨레는 알프스산맥에 위치한 마을로 스위스와도 가까운 곳이다. 그 지역은 다양한 민물 생선, 가재, 사슴, 멧돼지, 들새와 버섯 같은 식재료가 풍성하고, 부르고뉴와 가까워 와인도 풍부했다. 그는 명망 있는 법률가 집안 출신으로 자신도 디종대에서 법학을 공부하면서 화학, 약학 등에도 관심을 가졌다. 1778년에 이르러선 벨레 재판소 판사로 임명돼 법조인의 인생을 시작했다.

‘브리야-사바랭 치즈’ (사진=프랑스 그로노블의 프레데리크 보아생-드메리)


그의 아버지도 지역의 법률가이자 유지로 음식을 즐기는 빼어난 미식가였다. 어머니는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으로 자식 교육에는 매우 엄했지 요리 솜씨가 뛰어났다. 브리야-사바랭가의 연회에는 그곳의 주교와 의사 등 명사들이 줄이어 참석했다. 그의 형제자매들도 뛰어난 미각의 소유자였다. 그 누이 피에레트는 100살까지 살았는데 침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디저트를 빨리 가져오라고 소리치다가 사망했다고 한다. 그 집안의 성은 원래 브리야였는데 재산가인 친척 할머니의 성, 사바랭을 잇는 조건으로 큰 부를 물려받으면서 두 성을 붙여 브리야-사바랭이 됐다.

브리야-사바랭은 1789년 34세의 나이로 삼부회에 성직자, 귀족 외의 제3신분인 평민 대표 의원으로 선발됐고 이어 국민의회 의원이 됐다. 그 후 고향 벨레로 돌아가 시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혁명 와중에 공포정치가 시작되자 생명의 위협을 느껴 1794년 스위스와 네덜란드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브리야-사바랭은 인품도 훌륭하고 겸손했으며 어려서부터 다방면에 재능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라틴어 외에도 그리스어, 영어, 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줄 알았으며, 바이올린 연주는 전문가의 솜씨였고, 노래도 잘 불렀다. 그러한 재주가 그의 2년에 걸친 미국 생활을 견디게 해주었다. 그는 프랑스어와 바이올린 교습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락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 잘 적응했고 망명 생활을 하는 프랑스인들을 격려하며 지냈다.

페테르 클라스, 칠면조 파이가 있는 정물 (사진=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미식 담론의 경전 ‘미각의 생리학’



1796년 9월 브리야-사바랭은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최고 법원인 파기원의 판사가 돼 여생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 무렵부터 그는 직무를 수행하는 시간 외에는 친구들과 미식 모임을 즐겼고, 젊은 시절부터 오랫동안 염원해 왔던 ‘미각의 생리학’ 집필을 시작했다.

사바랭은 미식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간주하고 그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여 위상을 세우고자 했다. 그는 책의 저술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책의 구성은 지금의 안목으로는 짜임새가 부족하지만, 그 내용은 특이하고 방대하다. 책은 서문 앞에 배치한 20개의 잠언으로 시작된다. “치즈 없는 디저트는 마치 애꾸눈의 미녀와도 같다”와 같이 그를 논할 때면 빠짐없이 거론되는 명구들은 그 안에 다 들어 있다. 서두에 소개한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주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 주겠다”는 구절도 당연히 그중 하나다.

책은 감각과 미각에 대한 설명으로 시작해서 미식법, 식욕, 음식물 일반은 물론 미식가, 식사의 쾌락, 소화, 잠과 꿈, 레스토랑 경영자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먹는다’는 행위에 관련된 시각, 청각, 미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의 작용을 생리학적으로 설명한 것은 전례가 없는 시도였다. 그는 심지어 비만의 원인에 대해 논하면서 밀가루와 전분을 주범으로 지적했고, 탄수화물 대신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을 권장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는 훗날 그를 ‘저탄수화물 다이어트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계기가 된다. 그는 “미식법의 목적은 가능한 가장 좋은 음식을 수단으로 인간의 보존에 주의하는 것이다. 미식법은 음식물로 전환될 수 있는 사물들을 찾고 공급하고 요리하는 모든 사람을 지도함으로써 그 목적에 도달한다”고 정의했다.

‘미각의 생리학’은 1825년 12월에 발간됐다. 반향은 폭발적이었다. 하지만 평가는 엇갈렸다. 소설가 발자크는 “16세기 이래 그 어떤 작가도 브리야-사바랭만큼 문장에 넘치는 활력과 생명력을 불어넣지는 못했다.”고 극찬했다. 작가 오라스 레송은 “그의 책은 많은 뛰어난 지식을 바탕으로 최대한의 논술을 전개하고 있으며 존경받을 만하다”라고 했다. 의사이자 작가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은 “천재의 빛으로 먹는 일의 기술을 조명한 신적인 책”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그러나 샤를르 몽슬레는 “브리야-사바랭의 생각은 무엇 하나 믿을 만한 것이 없다. 그는 식욕과 마찬가지로 정신의 반짝임을 과시하고 싶어 하는 작은 사람이다”라고 혹평했다. 시인 보들레르는 더 공격적이다. 그는 “여러분, 브리야-사바랭의 책을 읽지 말기를. 신은 사랑하는 자를 쓸데없는 독서로부터 지킨다”고 했다. ‘요리의 왕’ 카렘은 “그는 가스트로놈이 아니라 단지 대식가였다”라며 폄훼했다.

페테르 클라스, ‘정물화’ (사진=시카고 미술관)
◇한 권의 책으로 칭송과 비판을 동시에 받았다

이렇게 칭송과 비판이 교차하는 상황은 이유가 있다. 당시 미식 문화가 꽃을 피우는 시점에 과학으로 포장된 그의 저작은 지식인, 문화인들로부터 호응을 이끌어 내기도 했지만, 그들의 지적 허영에 편승했다는 비난도 받는다.

브리야-사바랭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식통연감’의 발행인 그리모 드 라 레니에르와 자주 비교된다. 그리모는 사바랭보다 나이는 세 살이 어렸지만, 미식가로서의 활동은 훨씬 빨랐다. 그리모는 상업적이고 사바랭은 학술적이었다. 그리모는 성격이 기묘했고, 사바랭은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연주하는 고상한 취향의 소유자였다. 그리모는 1780년에 미식모임인 ‘수요클럽’의 회원이 됐고, 1803년 ‘식통연감’을 간행하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 브리야-사바랭이 혜성같이 나타나서 주목을 받자 미식계는 양분된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사바랭은 그의 책에서 그리모를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리모는 ‘미각의 생리학’을 비꼬는 심정으로 격찬했다. 일본의 식문화 연구자 야기 나오코는 그리모의 미묘한 반응은 브리야-사바랭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또 그녀는 그리모가 ‘식탁’을 지배하는 가스트로놈이었다면 사바랭은 ‘서재’의 가스트로놈이라고 했다.

1845년 파리의 유명 파티시에 오귀스트 줄리앙은 바바 반죽으로 만드는 케이크에 ‘사바랭’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냈다. 1930년대 치즈 전문가 앙리 앙드루에 역시 트리플 크림치즈를 ‘브리야-사바랭 치즈’라고 명명하여 그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 1931년 미식가 한림원 회장 퀴르농스키는 브리야-사바랭이라 이름 붙인 좌석을 차지하고 그를 송찬하는 연설을 했다.

“문명의 진보가 모름지기 우리의 욕구를 쾌락으로 바꾸는 것에서 비롯된다면, 브리야-사바랭은 새로운 쾌락을 낳고 그것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인류의 은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 한 권으로 이런 찬사를 받는 인물이 역사에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