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FT와 경쟁서 이길 병기, 라스코 동굴벽화에 숨겨뒀다

by오현주 기자
2022.05.03 00:01:00

△''히토 슈타이얼 ''데이터의 바다'' 전
국립현대미술관서 연 아시아 첫 개인전
''세계 가장 영향력 있는'' 獨 미디어작가
재난·전쟁, 독점디지털기술, 유동성 등
기술·철학·세계관 녹인 대작 23점 내놔
신작 ''야성적 충동'&apos...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히토 슈타이얼 개인전 ‘데이터의 바다’에 나온 ‘야성적 충동’(2022) 중 설치 일부. 구석기시대 라코스벽화를 옮겨놓은 듯한 동굴에 특수센서를 장착한 신비로운 식물을 줄줄이 매달아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21세기 인류가 어찌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건 외계인뿐 아닐까. 지구 내 디지털 기록은 전자파로 다 파괴될 거고, 의도치 않게 외계로 송출해버린 데이터가 지층을 쌓듯 전파로 쌓여 외계인만 읽을 역사로 기록될 거니까.”

잠깐 공간이 헷갈렸다. 미술관에서 들을 얘기가 아니다 싶었으니까. 맞다. 여기까지라면 미술가보단 인문학자라는 게 나을 수 있다. 실제 철학박사(오스트리아 빈 미술아카데미)인 작가라니 말이다. 정치와 예술의 경계를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자본·기술·사회문제를 아우르는 미디어 대작을 연달아 꺼내놨던 거다.

미디어아티스트 히토 슈타이얼(56).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일본계 독일인이다. 영상·영화작품 제작으로 작가의 길에 들어선 그이는, 이젠 난다긴다는 거장들을 다 제치고 세계적인 영상·미디어작가로 주저없이 꼽힌다. 그럼에도 여전히 실체가 안 잡힌다면 이 경력을 참고해도 될 듯하다. 영국의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해마다 미술인을 대상으로 선정한 ‘세계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서 1위를 찍은 기록 말이다. 5년 전(2017) 순위지만 어쩌다 한 번은 아니다. 2013년 69위로 100위권에 진입한 뒤 47위(2014), 18위(2015), 7위(2016)로 겅중겅중 뛰어올라 기어이 1위에 닿은 거니까. 이후로도 10위 안팎에 계속 머무는 중이다. 어쨌든 대중보다 줄세우기에 능숙한 전문가들의 판단이 그랬다.

작가 히토 슈타이얼이 ‘데이터의 바다’ 전에 내놓은 자신의 작품 ‘헬 예 위 퍽 다이’(Hell Yeah We Fuck Die·2016) 사이에 섰다. 배경이 된 작품은 2010년부터 5년 동안 빌보트 차트 노래 제목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영단어를 뽑아 타이틀로 삼았다. 모니터 안에 도는 3채널 영상은 재난현장에 인명구조를 위해 투입될 휴머노이드 로봇이 발길질을 당하며 훈련을 받는 모습을 담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길래. 바로 그 작업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자리가 꾸려졌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서울 종로구 삼청로 서울관에 꾸민 ‘히토 슈타이얼-데이터의 바다’ 전이다. 미디어영상·설치·오브제 등 23점만으로 서울관 4개의 전시실을 채울 만큼, 규모가 남다른 굵직굵직한 대형작품을 들여놨다. 작품의 규모만도 아니다. 자신의 논문(2016) 제목에서 따왔다는 전시명 ‘데이터의 바다’를 마치 ‘거대이슈의 바다’처럼 펼친 화두의 규모도 만만치 않다. 지구적 재난과 전쟁, 글로벌 유동성, 독점자본주의에서 튕겨나간 독점디지털기술, 신계급사회를 만든 빅데이터. 여기에 보이지 않는 힘의 싸움터가 된 ‘자본과 결탁한 미술관’까지. 기술은 물론 철학·세계관까지 꾹꾹 채워넣은 ‘역대급’ 미디어아트라고 할까.

히토 슈타이얼이 스스로 작품 속에 들어간 ‘미션완료: 벨란시지’(2019). 조르지 가고 가고시츠, 밀로스 트라킬로비치가 공동으로 저술·제작한 렉처 퍼포먼스 영상이다. 벨란사지는 명품브랜드 ‘발렌시아가 방식’을 의미. 베를린장벽을 무너뜨리고, 자유시장이데올로기, 포퓰리즘 등을 반영하며 정치권과 패션계를 넘나드는 ‘무기화된 데이터 알고리즘’으로 봤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아시아에서 여는 슈타이얼의 첫 개인전이다. 개막에 맞춰 서울로 날아온 그이는 “아시아 첫 개인전으로 왜 한국을 선택했느냐”고 묻자 “내가 선택한 게 아니라 한국이 날 선택한 것”이라고 말해 좌중을 웃기기도 했다. 그런데 사실이 그랬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슈타이얼의 전시를 유치하려 오랜 시간 공을 들였다. 2017년 뉴미디어 기획전 ‘역사를 몸으로 쓰다’ 전이 첫 만남이었다. 당시 슈타이얼은 20분짜리 미디어영상 ‘경호원들’(2012·단채널 HD 비디오)을 내놨는데, 그때 강렬한 인상으로 이듬해 개인전 계약을 성사시켰던 거다. 그 과정에서 ‘한국적 주제의 신작을 의뢰할 계획’을 공식화하기도 했더랬다. 이후 팬데믹으로 전시와 더불어 ‘한국적 신작’이 의도만큼 리드미컬하게 진행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이때 미술관에선 슈타이얼의 작품 ‘유동성 주식회사’(2014·단채널 HD 비디오&설치)를 구입해 소장하기에 이른다. 이번 전시에 나온 ‘유동성 주식회사’가 바로 그 작품이다.



금융·자본·데이터·사람이 미친 듯이 오가는 현상을 물로 표현한 작품에는, 세계경제위기 탓에 투자자문가에서 격투기 선수·해설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던 실존인물을 등장시키는데. 복면을 쓰고 날씨예보처럼 경제예보를 해대는 해설자 뒤론 ‘다우존스 하락’을 기상이변으로 풀어낸 세계지도가 어지럽게 펼쳐져 있다.

히토 슈타이얼의 ‘유동성 주식회사’(2014) 중 일부. 금융·자본·데이터·사람이 끊임없이 오가는 현상을 물의 이미지로 표현한 영상·설치작품이다. 세계경제위기 탓에 투자자문가에서 격투기 선수·해설가로 변신할 수밖에 없던 실존인물이 복면을 쓰고 나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상황에 대처해야 하는 유동적 금융시장이 격투기 시합과 다를 게 없다”고 설파하는 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혹시 슈타이얼의 예전 작품 ‘경호원들’을 기억한다면 이번 전시작들에 대한 이해가 훨씬 수월할 수 있다. 경호원을 세워 전쟁과는 아무 상관이 없을 듯한 미술관에서 ‘코드화한 전쟁’을 역설적으로 전개했던 작품은 미술관에 스민 사회불안·통제, 나아가 ‘전쟁 같은 평화’까지 암시했더랬다. 이번에도 유사한 배경이 보인다. 특히 18분짜리 미디어영상 ‘소셜심’(2020·단채널 HD 비디오). ‘소셜 시뮬레이션’의 줄임말로 타이틀로 단 작품은 팬데믹으로 혼란스러워진 사회상황, 예술창작의 조건, 변화하는 동시대 미술관의 위상 등을 다뤘는데, 그 두 편 중 사회문제에 집중한 한 편에 등장시킨 인물들 역시 정복차림의 경찰관·군인인 거다. 다른 점이라면 실물 대신 무수한 아바타를 동원해 비디오게임하듯 대중시위를 진압하는 그들의 행위를 화려한 춤으로 표현했다는 거랄까. 이들 아바타를 두고 슈타이얼은 “팬데믹이 만들어낸 어쩔 수 없는 모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히토 슈타이얼의 ‘소셜심’(2020) 중 한 장면. 18분짜리 미디어영상으로 제작한 작품은 팬데믹으로 인한 사회불안 상황을 대중시위에 동원된 경찰관·군인의 아바타로 고조시키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히토 슈타이얼의 미디어영상 ‘소셜심’(2020) 중 한 장면. 경찰과 시위대 아바타에게 현란한 춤을 입힌 역동적 움직임이 마치 비디오게임 속에 들어선 듯하다. 이들의 춤은 팬데믹 이후 퍼지기 시작한 대중시위와 이를 진압하는 경찰·군인의 행위를 번안한 일종의 사회적 안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기대작은 ‘야성적 충동’(2022·단채널 HD 비디오 & 설치)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작지원하고 세계서 처음 공개하는 작품은, 24분짜리 영상도 모자라 특수센서가 달린 식물이 자라나는 환경을 3채널로 설치하기까지 했는데. 내용은 이렇다. 스페인 작은 산골마을에 사는 양치기를 촬영하던 리얼리티TV쇼가 팬데믹으로 방송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자 ‘동물격투기’를 메타버스 제작으로 대체하게 된다. 그러곤 가상세계에서 동물이 죽어나갈 때마다 NFT를 발행하는 이벤트까지 곁들였는데. 종국에 NFT 적자생존경쟁에까지 내몰리게 된 양치기는, 구석기시대 라스코벽화를 옮겨다 놓은 듯한 동굴에서 그들만이 가진 이종간 상호교류의 힘을 불러오기로 한다. 바로 박테리아를 기반으로 한 블록체인에 코드화돼 있는 ‘치즈코인’이다. 양치기 신변에 생긴 변화를 디지털기술로 체감케 한 이 대작은, 결국 관람객을 이끌고 긴 동굴을 걷게 하며 메타버스·NFT와의 경쟁에서 무기가 될 ‘절대신비’를 더듬게 한다.

히토 슈타이얼의 ‘야성적 충동’(2022) 중 설치 일부. 구석기시대 라코스벽화를 옮겨놓은 듯한 동굴에 특수센서를 장착한 신비로운 식물을 줄줄이 매달아뒀다. 영국 경제학자 존 매이너드 케인스를 인용(1936)한 작품명은, 인간의 감정·탐욕·야망 두려움으로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이 미친 듯 날뛰는 현상을 지적한 그 의미 그대로를 가져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작품명 ‘야성적 충동’은 영국 경제학자 존 매이너드 케인스를 인용(1936)했단다. 인간의 감정·탐욕·야망 두려움으로 통제할 수 없는 시장이 미친 듯 날뛰는 현상을 지적한 그 대목에서 나왔더랬다. 결국 작가는 86년 전이나 지금이나 ‘야생화한 자본주의’로는 다를 게 없다는 얘기를 이렇게 장구하게 꺼내놓은 거다.

사실 말보단 관람이다. 한 가지 팁이라면, 작가 스스로도 말했듯, 전시작에 교묘히 아니면 대놓고 심어놓은 난해한 주제를 일일이 따져보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생각과 철학이 일치하든, 현란한 미디어아트쇼가 시선을 사로잡든, 눈과 마음에 담을 작품 한 점에라도 기꺼이 빠져들면 된다는 얘기다. 20분 넘기는 것쯤은 가뿐한 미디어영상들 앞에는 작가가 작품의 연장선에서 배치했든, 미술관이 배려했든 ‘푹 파묻혀 앉을 곳’을 여럿 만들어뒀다. 전시는 9월 18일까지.

서울 종로구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서 연 개인전 ‘데이터의 바다’ 개막에 맞춰 한국을 찾은 히토 슈타이얼이 전시장 입구의 벽면을 장식한 포스터 앞에 섰다. 전시에는 미디어영상·설치·오브제 등 23점만으로 서울관 4개의 전시실을 채울 만큼, 규모가 남다른 굵직굵직한 대형작품을 들여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