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빛과 색을 잡고…다시 돌아오는 데 32년이 걸렸다

by오현주 기자
2022.03.15 03:30:00

갤러리조은서 개인전 '그린데이즈' 연 작가 최명애
사회이슈 담은 무채색서 멈췄던 화업
폭발한 듯한 '자연 색'으로 다시 이어
컬렉터 움직인 색놀이…25점 완판 눈앞
"그림은 머리로는 안돼, 손을 움직여야
얼마 남지 않은 시간…그저 벽돌 쌓듯"

작가 최명애가 서울 용산구 갤러리조은서 연 개인전 ‘그린 데이즈’에 건 자신의 작품 ‘빛과 색 1’(2021) 옆에 섰다. 마치 크레파스로 칠해 완성한 듯한 작품을 두고 작가는 “산에서 봤던 색만 뽑아 캔버스에 앉힌, 일종의 색놀이”라고 설명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더듬어보면, 그랬다. 하느라고 했던 거다. 배운 대로 그리고, 느낀 대로 표현했다. 충직하게 붓을 움직였고 치열하게 덤볐더랬다. 그러니 그 참담한 결과가 작가 탓일 리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도 짐은 온전히 작가의 어깨에 얹혔다. “500호, 700호를 준비할 만큼 열의를 다했던 개인전이었는데 한 점도 못 팔았다. 그 큰 그림을 다 끌고 돌아와 아파트 안방에 세워뒀는데, 참 우울하더라.”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붓을 잡아야 하는 이유보다 붓을 잡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늘어났던 거다. 급기야는 병까지 생겼다. “다시는 그림을 못 그리겠구나” 했다. 그래도 일상의 하루는 오고 갔고, 어느 날 문득 돌아보니 30년이 지나 있었다. 순간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었단다. 살아 있는 동안 마지막 기회란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내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더라. 5∼7년 전쯤일 거다. 그림으로 돌아가자 결심을 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무거웠을 그 붓을 그이는 다시 들었다.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갤러리조은. 작가 최명애(71)가 개인전을 열었다. 1990년 그해 그 전시(‘달리는 사람들’ 전) 이후 처음이니, 무심하게 센 햇수로도 32년 만이다. 전시명은 ‘그린 데이즈’(Green Days). 굳이 의미를 풀자면 ‘살아 있는 날들’쯤 되려나. 그 타이틀답게 화사하게 붓길을 낸 화면들이 시선을 바쁘게 이끈다. 그간의 무거운 침묵이 녹아 여기저기 번들거릴 만도 한데, 때론 새털처럼 가볍게 때론 나무처럼 굵직하게 그어낸 선과 면은 그저 싱그럽다, 또 생생하다.

최명애의 ‘기억의 숲 1’(2021). 색은 달라졌지만 “필치는 예전 그대로”라는, 그 강렬한 붓선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웠다. 100호 규모 작품 두 점을 붙인 대작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시작은 모두 25점. 작업실에서 작가가 들고 나온 작품이 40여점이라니, 도록에 이미지만 싣고 미처 못 건 작품도 15점이나 된다.

숲을 통해 들여다본 세상이야기. 근래 작가의 작업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이거다. 그 이야기 속에는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바위가 있다. 또 바람도 있고 계절도 있고 기억도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추상이란 언어로 작품 속에서 대화를 하는데, 슬쩍슬쩍 구상의 형체를 내비치기도 한다.

“처음부터 추상을 했다. 내 성향에 구상보단 추상이 맞았다.” 그런 그이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면 서울대 미대 서양화과를 다니던 시절의 은사였다는 유경채(1920∼1995) 교수와 정창섭(1927∼2011) 교수를 꼽아야 한다. 한국 현대미술 1세대라 할 두 화백은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기도 했다. 정 화백은 한지와 추상미술을 결합하는 시도로 ‘닥의 화가’로 불렸고, 류 화백은 진한 감성을 깔고 시간·계절·자연의 흐름을 옮겨내는 한국적 추상화의 길을 텄다. 하지만 정작 그이의 그림은 스승의 길을 곧게 따르진 못했다. “당시 사회적 이슈들”이 발목을 잡았던 거다.

최명애의 ‘돌에 대한 생각’(2014·오른쪽부터), ‘왕원추리’(2004), ‘도라지와 벌개미취’(2004). 모두 종이에 아크릴물감을 올려 완성했다. 은밀한 어딘가를 헤집고 들어가 찾아낸 듯한, 큰 풍경을 그린 신작과는 다른 소소한 디테일이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국가적으로 정치적으로 모든 게 불안하던 시절, 젊었던 작가는 일상에 늘 묻어나는 그 불안을 캔버스에 옮겨냈더랬다. ‘행동하는 무채색’이란 표현이면 그 시절이 설명되려나.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믿었던 거다. 그 ‘기능’을 그이가 말 속에 섞어냈듯 500호, 700호로 펼쳐냈다고 하니. “그 시대의 흐름을 어둡게 묘사한 작품들이었는데, 화단에는 안 먹히고 개인적으로는 우울하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암까지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번 개인전만 본다면 어찌 그 시절을 상상해낼 수 있을까. 노랗고 빨갛고 파랗게 입힌 ‘자연’들이 갤러리의 하얀 벽면을 화려하게 물들이고 있지 않은가. 폭발하듯 번져 낸 자연의 색이라니.

“경기 과천 관악산 밑에 집과 작업실이 있다. 덕분에 요즘도 한 주에 한 번씩은 관악산에 오르는데 나무 냄새, 바람 기운 같은 산 느낌이 생긴다. 거기서 받은 영감을 추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사실 필치는 예전 그대로인데 색이 달라졌다. 강한 터치는 옛날식인데 부드러운 컬러가 요즘식이랄까.”

최명애의 ‘숲으로’(2021·왼쪽)와 ‘산의 기억’(2021). 작가는 “최근 표현의 대상은 자연, 그중에서 숲”이라며 “그림 속 나무, 산, 꽃, 공기의 흐름, 생명체, 바위가 비구상적으로 등장한다”고 말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테마를 바꾸고 색이 달라진 ‘숲과 바람길’(2017), ‘숲으로’(2020) 등을 시작으로 ‘기억의 숲’(2021) 연작, ‘숲에 있는 것들’(2021), ‘산풍경’(2021), ‘산의 기억’(2021), ‘관악산 1’(2021)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 틈에 간간이 섞인 ‘다른 것’도 보인다. ‘빛과 색’(2021) 연작이다. 말 그대로 총천연색을 찍어낸 듯한 ‘질서정연한 무질서’의 색을 잔칫상처럼 펼쳐낸 작품. “일종의 색놀이다. 산 그림도 답답하다 싶을 때 거기서 보고 왔던 색만 뽑아 놀이를 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그 말끝에 그이는 “사람의 본성은 안 바뀌는데 환경이 사람을 바꿔놓는구나 싶더라”며 웃었다.

최명애의 ‘산소 캡슐이 있는 풍경’(2021). 작가는 시각언어 중 가장 효과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요소로 ‘색과 선’을 꼽았다. 색은 심리상태를, 선은 기운생동의 에너지를 묘사하는 데 효과적인 도구라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시를 개막한 지 두 주 남짓, 전시작 25점 중 20여점이 팔렸다고 갤러리 관계자가 귀띔한다. 호당가격은 15만원 정도. 신진작가와 다름없는 작품가에도 작가는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하단다. “개인전을 다시 할 수 있는 것만도 고마워 작품이 팔린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뒤늦게 뛰어든 자신의 작업을 그이는 ‘배의 평형수 채우는 행위’에 비유했다. 억눌린 내적 자아를 토해내는 일이지만 결국은 세상과 화해를 해야 가능한 일이라고. “이젠 더이상 양보할 수 없는 내 시간이지만, 그렇다고 그동안 인생을 낭비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그래서 미술시장이 좋든 나쁘든, 유명작가가 되든 못 되든, 이런 문제와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싶다는 거다.

작가 최명애가 서울 용산구 갤러리조은서 연 개인전 ‘그린 데이즈’에 건 자신의 작품 ‘빛과 색 2’(2021) 옆에 섰다. 말 그대로 총천연색을 찍어낸 듯한 ‘질서정연한 무질서’의 색을 잔칫상처럼 펼쳐낸 작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 ‘할 일’을 위해 그이는 매일 출퇴근하듯 ‘하루 10시간씩 규칙적인 작업’을 지켜나간단다. 벽돌공이 매일 공들여 하나씩 쌓아나가듯 말이다. 그림은 손을 움직여야지 머리로는 안 된다는 걸 오래전에 아프게 배웠던 터. “내 인생에 남은 10년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안다. 마음이 급해지기도 하지만, 작품을 할 때 생기는 고민과 갈등, 또 방황까지 작가라면 누구나 겪는 그것을 젊은 시절에 다 치러낸 셈치면 된다며 다독인다.”

과연 누군들 어떤 이의 32년은 ‘쉬웠다’고 말할 수 있겠나. 그래서 그 세월은, 이미 보낸 만큼이 아니라 이제 보낼 만큼에 따라 갈리게 되는 거다. 바로 마지막 벽돌 하나를 더 올리느냐 올리지 못하느냐에 따라. 이왕 올릴 거 알록달록 색잔치면 더 좋겠고. 전시는 23일까지.

서울 용산구 갤러리조은 ‘그린 데이즈’ 전 전경. 작가 최명애의 ‘빛과 색 1’(2021·왼쪽), ‘기억의 숲 1’(2021)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걸렸다. 32년 만에 연 작가의 개인전을 대표하는 두 점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