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트럼프는 왜 '기생충'이 맘에 들지 않을까
by박한나 기자
2020.02.23 00:05:00
기생충이 부추긴 ''금수저·흙수저론''
빈부격차 큰 미국에서도 담론 거세
봉준호 "자본주의 심장인 미국 반향 당연"
[이데일리 박한나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21일(한국시간) 미국에서 선거유세 연설 중, 트럼프는 “한국과 무역 문제가 많다”며 뜬금없이 이 영화를 저격했다.
기생충의 미국 배급사가 받아친 말처럼 트럼프의 불만은 ‘이해’는 간다. 자국 영화 대신 한국 영화가 수상한 것 자체도 불만이겠지만 빈부와 계층격차를 주제로 한 기생충의 내용 역시 반갑지 않으리라고 보이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기생충은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9년 최고의 영화 중 하나로 꼽은 작품이다.
| 트럼프: “한국 영화가 작품상? 기생충이 그렇게 좋은가. 난 모르겠는데.” 배급사: “이해한다. 그는 자막을 못 읽으니까.” (사진=영화 ‘기생충’의 미국 배급사 네온 트위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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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은 일각에서 “시장경제를 부정하고 사회저항운동을 부추기는 영화”라고 평가했던 ‘설국열차’ 보다 더 직접적으로 빈부격차 문제를 꼬집는다. 기생충은 지금 한국의 화두인 ‘금수저·흙수저론’으로 미국 사회에도 토론의 불을 지피고 있다.
기생충이 국제 영화상을 휩쓸면서 미국 매체는 영화의 주제의식에 주목했다.
뉴욕타임즈는 기생충에 세계가 반응하는 것은 ‘미국식 자본주의 상식에 금이 갔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열심히 노력하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가난한 개인은 발버둥쳐도 더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워싱턴포스트는 “이 영화와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미국 관객에게 강하게 울려 퍼졌다”며 “기생충은 한국의 불평등을 악몽처럼 그리지만, 미국의 현실은 훨씬 더 나쁘다”라고 보도했다.
| 워싱턴포스트가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 통계를 인용해 미국과 한국의 각 상위 1%가 차지한 부를 비교한 것. (사진=JTBC 뉴스화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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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 통계를 인용해 한국과 미국의 불평등지수를 본격 비교했다. 이에 따르면 한국에서 최상위 1% 계층이 나라 전체 부의 25%를 차지하고, 하위 50%가 소유한 재산은 2%도 되지 않는다.
미국은 더 하다. 최상위 1%가 전체 부의 38.6% 차지하고, 하위 50%는 단 1%도 차지하지 못한다. 심지어 한국의 하위 50%는 약 2%의 자산이라도 갖지만, 미국의 하위층의 자산은 아예 마이너스 상태라고 꼬집었다. 또 한국에서는 상위 1%가 전체 국민소득의 12%를 버는 한편, 미국의 상위 1%는 20% 이상을 벌어들인다고 분석했다.
다른 빈부격차 지표인 지니 인덱스(Gini Index)에서도 미국은 한국보다 빈부격차가 더 심하고, 매년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니 인덱스는 숫자가 0에 가까울수록 평등한 것인데, 미국의 지수는 지난 2014년 0.47에서 2018년 0.485로 증가했다. 한국은 2015년 기준으로 0.341로 캐나다(0.321)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미국은 한국 못지않게 불평등 문제에 익숙하고 또 민감하다.
| 반지하방에서 공짜 와이파이가 가장 잘 잡히는 곳은 화장실이다. (사진=영화 ‘기생충’ 스틸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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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불편한 지표들은 기생충의 촘촘한 각본과 흥미진진한 스토리에 녹아있다. 그래서 영화를 재미있게 보고도 극장에서 나오는 길에는 왠지 입맛이 쓴 것이다.
국내 관람객들이 쓴 영화평에는 ‘뭔가 모를 불쾌한 영화다. 영화에 나오는 수석이 내 가슴에 얹히는 것 같다’, ‘가난을 아는 사람에게는 너무 잔인한 영화’ 등의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다.
영화 포스터의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라는 말과는 정반대인 결론. 이 이야기를 청소년이 감당하기 버거우니 15세로 결정된 관람등급을 조정해야 한다는 의견도 눈에 띈다. 꼭 특정 장면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벌써 들려주고 싶지 않은 우화라는 뜻이다.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원장은 지난 11일 YTN 라디오에서 “소득이 높은 나라 중 지금 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나라가 미국이고, 안타깝게도 미국을 열심히 쫓아가는 게 대한민국”이라며 “불평등 문제는 세계적으로 심각합니다만, 이 두 나라에서 이 영화의 반향이 크다는 게 우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고 분석했다.
그는 기생충 내용과 관련해 “계급적인 사회에서 결국 더불어 사는 공동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타인은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문제 제기를 아주 치열하게 하는 영화”라며 “그래서 불편했고,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또한 영화의 목적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럼에도 우리는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대안을 찾고 희망을 찾아야 한다고, 저는 경제학자로서 그런 느낌도 들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은 어떻게 생각할까. 그는 5일 미국 LA에서 열린 제77회 골든글로브 시상식 기자회견에서 ‘미국 관객이 왜 이렇게 이 영화에 환호하는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고 “자본주의에 관한 영화인데, 자본주의의 심장 같은 나라인 미국에서 논쟁적이고 뜨거운 반응이 있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답했다. 또 “이 거대한 자본주의 세계에서 하루하루 살면서 계급 이야기를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할 거 같다”고 한다. ‘불편해도 봐야 하는 현실’이라는 말로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