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칼럼]"바보야, 문제는 주민번호야"
by정병묵 기자
2014.02.24 06:00:00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문송천 교수] 사상 최악의 카드사 개인정보 유출 사건이 터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이번 사태는 불을 보듯 뻔히 예상하고도 남았던 사건이었다. 정보유출의 중심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주민번호였기 때문이다. 사태 발생 후 정부 당국은 주민번호 대체수단인 ‘아이핀’ 이용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지만, 주민등록번호 제도라는 본질적인 문제점에 대한 고민이 결여돼 있다.
마스터 키, 즉 ‘만능 열쇠’라는 것이 있다. 사람의 경우에는 주민번호가 만능 키다. 그것 하나만 갖고 있으면 특정 개인에 대한 다른 정보 무려 70여 가지에 손쉽게 접근 가능하게 해주는 존재다. 카드번호는 주민번호에 비하면 데이터 차원의 중요도가 한참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참 살기 편하다. 대중교통이 우리처럼 잘 돼 있거나 아파트 생활이 우리처럼 보편화한 나라가 별로 없다. 그러나 편리성의 정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 게 바로 주민번호 제도라는 것을 밝히지 않을 수 없다. 동네 병원에 가도 건강보험카드를 지참할 필요 없이 주민번호 하나면 다 되는 식으로 처리되니 말이다.
우리가 사회생활 하는데 있어 주민번호가 편의성을 제공해주는 만큼 그에 비례해서 우리의 개인 신상은 불법정보 유통자에게는 손쉬운 먹잇감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모르는 것이 문제다. 생활 편리성과 해킹 용이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가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인으로 태어나 사회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군번 같은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는 한국이 유일하다. 이런 고유번호를 부여하는 국가는 세계적으로 10곳 이내이나 대부분은 인권탄압국으로 분류되고 국제무대에서 자신 있게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나라는 놀랍게도 단 둘이다. 한국과 중국뿐이다.
한국 정부가 50여 년 전에 주민번호라는 제도를 도입했을 당시에는 주민번호가 해킹과 불법정보 유통의 온상을 제공하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못했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순전히 신원확인 목적으로 선거 투표 시와 범죄 수사 시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인터넷의 활용이 증가하면서 주민번호가 온갖 상거래에 신원보증용으로 활용되기에 이르렀다. 애초 정부가 예상하지 못한 쪽으로 용도가 확대되면서 주민번호가 정보유출의 원인 제공자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 지경까지 됐으니 우리나라 성인의 경우 자신의 주민번호가 도용당한 적이 평균 200회 정도로 집계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희한한 세상이 됐다. 도용된 사실을 알아도 무슨 액션을 취할 방도가 막연하다.
주민번호를 매개체로 해서 정부와 범죄자 간에 공모가 이루어졌다고 표현한다면 다소 지나친 면이 있겠지만 실상은 거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아이핀 같은 대체 수단을 강구할 것이 아니다. 아이핀도 결국 주민번호를 기반으로 해 아이핀 관리 기관이 해킹 당하면 같은 문제가 되풀이될 뿐이다. 아예 이 문제를 원점에서 접근해 해결해야 한다.
우선 주민번호는 절대로 외울 필요가 없게끔 해야 한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에는 주민번호 제도는 없으나 유사한 식별번호 제도는 있다. 연금번호와 세대번호를 사용한다. 그런데 자신과 관계된 이런 번호를 외우고 다니는 시민은 거의 한 명도 없는 것이 그들의 생활 방식이다. 번호를 기입하라는 곳이 워낙 없다 보니 외우려 해도 외워지지 않는다.
둘째, 주민번호가 문제의 원인일 때에는 민원에 의해 전화번호나 카드번호처럼 간단히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주민번호가 변경되더라도 정부는 국민에 대한 투표권관리와 범죄수사권 관리에 전혀 지장을 받지 않도록 IT를 정교하게 활용해야 한다.
주민번호가 범죄자들에게 가장 돈이 되는 먹잇감으로 자리매김 하고있는 상황에서는 선진국과 같이 폐기로 과감하게 나가든지 아니면 우리 고유의 번호 개선책을 강구하든지 양단 간에 결단을 내려야 할 때다. 이 문제로 여야 정국이 혼탁해지고 정보유출사태가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해외 토픽감이 될 뿐이다. IT 강국답게 주민번호 부작용 문제를 정공법으로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