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in][5th 커버]14th SRE, 1~3위 신평사 격차 역대 최대

by오상용 기자
2011.11.01 08:25:15

시장의 눈은 냉혹해졌다

마켓in | 이 기사는 10월 31일 16시 11분 프리미엄 Market & Company 정보서비스 `마켓in`에 출고된 기사입니다.

[이데일리 오상용 기자] 비디오아티스트 고(故) 백남준 선생 가라사대, “예술은 사기다.”저게 뭐야, 무슨 의도야 라고 고개를 갸웃대는 대중에게 예술가는 사기를 쳐야 한다. 그것도 고등의 사기를 쳐야 먹힌다. 지난 6개월 국제신용평가사도 온몸으로 외쳤다. “신용평가는 쇼”라고. 쇼가 먹혀 들려면 충격을 줘야 한다. 그것도 센 놈을 쥐고 흔들 때 충격은 배가된다. 2011년 금융시장은 국제신평사의 강렬한 퍼포먼스에 휘청였고, 일부 논객은 늦은 감이 있지만 후련하다고도 했다.
 
한바탕 푸닥거리로 국제 신평업계는 구겨진 체면을 다소나마 회복한 것 같다. 그럼 국내 신평업계의 체면은, 신뢰도는 얼마나 회복됐을까.14회째를 맞은 이데일리 신용평가 전문가 설문조사(SRE)를 통해 회사채 시장 전문가의 평가를 들어봤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국내 신평업계의 등급신뢰도는 6개월만에 다시 높아졌다. 14회 SRE 설문에 응한 전문가 112명이 국내 신평업계에 부여한 등급신뢰도 평균점수는 3.15로, 지난 13회 설문 때 보다 0.15포인트 올랐다. 신평사의 신용등급 신뢰도는 ‘높다’를 5점, ‘낮다’를 1점으로 해서 설문참여자가 1~5점까지 책정한 점수를 평균해서 산출한다. 
 

지난 2009년 4월 9회 SRE 이후 내리막을 타던 신평사 등급신뢰도는 12차 때 반짝 회복후 떨어진 뒤 이번 조사에서 다시 상승반전했다. 14차 SRE에서 집계된 등급신뢰도 3.15는 지난 10차 설문(3.17점)이후 가장 높다.
 
응답자중 보수적 태도를 견지해 왔던 크레딧 애널리스트들도 이번에는 비교적 후한 점수를 줬다. 크레딧애널리스트 51명이 부여한 점수는 평균 2.92로 9회 SRE(2.96점) 이후 가장 후하다. 지난번 설문 때 보다는 0.26포인트 높아졌다. 개별 신평사를 살펴봐도 3개사 모두 13회 SRE 때 보다 신뢰도 점수가 올랐다. 신평사별로 많게는 0.3포인트, 적게는 0.06포인트 높아졌다.

신평업계내 어떤 변화가 이 같은 결과를 가져온 것일까. 신용평가 3사의 평가관행이 개선된 것일까. 등급버블 논란이 가실 만큼 기업들의 재무구조는 탄탄해지고 실적은 개선된 것일까. 신평사의 평가논리는 치밀해지고 평가방법은 더 정밀해진 것일까. 위험산업, 개별기업의 재무리스크에 대한 신평사의 조기경보 기능은 강화된 걸까.


6개월 사이 신평사의 평가역량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고 보는 전문가는 없다. 자체 역량개선 보다는 외부 환경변화에서 이유를 찾는 이가 많다. 그 중에도 이번 설문조사 대상기간(2011년5월~2011년10월)중 굵직한 신용사고가 적었던 점이 주요 배경으로 꼽힌다.
 
지난 13회 SRE 대상기간이던 작년말과 올해초엔 재벌계 건설사와 메이저 해운업체들이 잇따라 워크아웃과 법정관리를 신청해 시장참여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효성그룹 계열의 진흥기업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는가 하면, LIG그룹의 LIG건설, 한솔그룹의 한솔건설이 줄줄이 법원에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 중견 건설사의 크레딧 이벤트는 13회 SRE가 한창이던 4월까지 이어져 삼부토건과 동양산업건설이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여기에다 연초부터 부산저축은행 사태도 터져 나왔다. 재벌계 건설사에 이은 대형 저축은행의 퇴출로 여기저기서 피해자가 속출했다. 저축은행 예금자와 훈수위채권자는 발을 동동 굴렀고 구조조정 건설사의 회사채와 기업어음(CP)을 보유했던 사람들의 손실도 적지 않았다. 신용사고가 잇따르자 이들에게 후한 등급을 부여했던 신평사에 대한 원성도 높았다. 위험산업과 위험기업에 대한 조기경보 역할은 나몰라라 했고, 부실한 등급평정으로 투자자의 손실을 키웠다는 비난이 이어졌다. 이는 13회 SRE에서 신평사의 등급신뢰도가 떨어졌던 이유다.

반면 이번 설문 대상기간(5~10월)중엔 신용사고가 눈에 띄게 줄었다. 프라임그룹 계열사의 워크아웃 신청이 있었지만 파장은 제한적이었다. 9월 저축은행권의 추가 퇴출은 연초 보다 파괴력이 덜했다. SRE 한 자문위원은 “5월 이후 굵직한 신용 사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면서 “크레딧 시장 전반이 조용한 편이었다”고 말했다. 그 덕에 신평사에 대한 시장의 불만도 줄어 신평사의 등급신뢰도를 끌어올리는 배경이 됐다는 설명이다.
 

 

 
회사채 투자에 나선 시장 참여자가 늘어난 것도 신평사의 등급신뢰도가 높아진 요인으로 거론된다. SRE 한 자문위원은“최근 시장 참여자들이 회사채에 많이 굶주린 것 같다”며 “이런 시장 환경이 신평사의 등급신뢰도 상승에 일조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회사채 시장내 ‘사자’ 분위기가 형성되면 투자자 입장에선 신규 발행물이나 기존 유통물이 예뻐 보이게 마련. 수급효과로 매수한 회사채의 가격이 오르기라도 하면 덩달아 해당 회사채에 등급을 부여한 신평사 역시 투자자로부터 긍정적인 평을 듣게 된다. 반면 회사채 시장내 `팔자` 분위기가 우세해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런 시기 재무위험이 커지는 기업이 나타나면 여기에 등급을 부여한 신평사는 투자자로부터 뭇매를 맞고 신뢰에 금이 간다.
 
신용등급이 오른 기업이 13회 SRE 때 보다 적었던 것도 등급신뢰도 상승에 일조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등급상향 업체 수가 적다 보니 등급평정의 시빗거리도 줄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역으로 신용등급 버블이 포화상태까지 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증권업계 한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서둘러 등급을 끌어올린 탓에 더 이상 올릴 만한 업체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신평사의 공격적인 행보로 국내 신평업계가 반사효과를 입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4월 미국의 국가 신용등급 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춘 S&P는 넉달 뒤 미국의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떨어뜨렸다. 미국 하원과 상원의 정부채무 법정한도 상향에 대한 합의안이 가결된 직후 이뤄진 조치였다.
 
불변의 ‘트리플 A’ 미국의 신용등급을 떨어뜨리자, 국제신평사의 행보에는 거칠것이 없었다. 이는 재정위기에 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폭격으로 구체화됐는데, 그리스에 대한 추가적인 등급강등 조치가 취해졌고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신용등급이 잇따라 떨어졌다. 뒤이어 주요국 은행들의 신용등급이 내려갔고, 프랑스 대형 은행들의 신용등급도 무더기로 떨어졌다. 최근 무디스는 프랑스의 국가신용등급마저 떨어뜨릴 수 있다며 압박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2차 소버린 쇼크의 시발점은 미국이지만 실상 더 큰 피해자는 유럽이다. 성동격서(聲東擊西), 월가의 예상대로 애초부터 공격목표는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는지 모른다. 2008년 위기 때도 흔들림 없는 달러패권을 확인했던 만큼 ‘월가의 충견’들로선 부담이 적었던 전략이다. 이들의 쉼 없는 신용등급 강등 조치에 금융시장 불안감은 커져 갔다. 반면 미국발 금융위기의 원흉이자 개혁 대상으로 전락했던 국제 신평사들로선 자신의 존재감, 존재의 이유를 유감없이 드러낼 수 있는 기회였다.
 
SRE 한 자문위원은 “해외 신평사들이 등급 하향을 많이 하니까 국내 신평사도 등급을 떨어뜨리고 있다는 착시현상이 생긴 게 아닌지 모르겠다”고 했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 등 해외 신평사의 굵직한 이벤트로 국내 신평업계가 반사효과를 봤다는 말이다. 다른 자문위원은 “이는 역으로 그만큼 국내 신평사의 등급조정에 시장이 무관심하다는 의미”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국내 신평사의 등급신뢰도 상승은 외부 요인에 기댄 측면이 크다. SRE 한 자문위원은 “평정대상 기업체 수는 미국발 금융위기전인 2007년과 비슷하지만 BBB등급의 수는 반으로 줄고 A등급의 이상의 비중은 80%로 늘었다”고 말했다. 그는 “2007년과 비교해 유럽과 미국 등 글로벌 이슈도 많았는데도 왜 우리기업만 좋아졌다고 국내 신평사들은 이야기 하는지 납득이 안 간다”고 했다.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지만 신평사들이 역량강화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평가도 나왔다. SRE 다른 자문위원은 “신용등급 버블이라 불릴 만큼 등급상향 추세가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신평사의 역량이 과거에 비해 전혀 나아진 게 없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그는“SRE 등을 통한 시장의 요구로 신평사의 기능과 역할도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면서 “만약 시장의 아무런 견제 없이 초기 등급평정 방식이 계속됐다면 지금의 등급버블은 훨씬 심해졌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 같은 시장 참여자의 감시는 최근 들어 신평 3사에 대한 옥석가리기 강화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 등급신뢰도 평가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신평사와 최하위 점수를 받은 신평사간 격차는 최근 들어 확대되는 추세. 이는 14회 SRE 들어 더 확연해졌다.
 
이번에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신평사를 한국기업평가로 3.53점,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곳은 한국신용평가로 3.04의 평점을 기록했다. 1위와 3위간 점수차는 0.49포인트로 지난 2005년 4월 SRE는 실시한 이후 역대 최대다.
 
51명의 크레딧 애널리스트들이 매긴 평점에서도 이같은 양상은 두드러진다. 한기평은 이들로부터 평균 3.51의 점수를 받은 반면 한신평은 2.71의 점수를받았다. 크레딧 애널리스트들이 매긴 1,3위간 점수차는 0.8포인트에 달해 지난 1차 SRE(0.85포인트)이후 가장 컸다. 반면 3개 등급사간 차이가 없다는 응답은 전체의 25.9%를 기록, 지난 9차 SRE이후 가장 낮은 비중을 차지했다.
 
증권업계 한 관계자는 “1위와 3위 신평사간 격차가 확대되고 있는 것은 개별 신평사에 대한 시장의 평가와 인식이 그만큼 냉엄해지고 있다는 반증”이라고 설명했다. 신평업계 전반에 대한 시장 분위기는 다소 호의적으로 돌아섰지만 잘하는 신평사와 못하는 신평사를 구분하려는, 즉 옥석을 나누려는 시장의 의지는 강인해진 것이다.
 
물론 신용등급 결과물만을 놓고 보면 신평사간 차이를모르겠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이에 대해 SRE 한 자문위원은 “발행사의 입김이 워낙 강하다 보니 표면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면서“다만 행간에 의미를 실어 시장에 최대한 정보를 전달하려는 노력, 평가보고서의 품질, 연구활동 등에서 1위와 3위간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고 말했다.
 
다른 SRE 자문위원은 “등급신뢰도가 높은 신평사가 인정받고 시장점유율도 확대돼야 하지만, 실상은 등급신뢰도가 높을수록 기업들로부터 외면 받는 역(易)의 상관관계를 지닐 때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는 회사채 투자자와 인수 증권사, 회사채 발행사(기업), 감독당국 등 시장 참여자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숙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