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 매달고 방패 세우고…베를린 화랑가선 무슨 일이?

by오현주 기자
2019.07.22 00:45:01

아라리오갤러리 삼청 ''척추를 더듬는 떨림'' 전
베를린서 활동하는 작가 4인 한국 첫 전시
사회현상 꼬집고 개인경험 해체하는 25점
"트렌드 타지 않고 자신만의 작업을 할 뿐"

네덜란드 출신 작가 조라 만이 자신의 작품 ‘코스모파기’(2015)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아프리카 케냐 해변과 수로에 버려진 이른바 ‘쪼리’라 불리는 슬리퍼를 소재로, 그 조각조각을 가는 실에 줄줄이 매달아 만들었다. 환경문제를 극적으로 고발한 셈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1. 시작은 커튼이다. 안과 밖을 가르는 장막. 흰색과 검은 색으로 면을 분할한, 치렁치렁 늘어진 ‘실커튼’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중간에 새긴 것은 나무의 잎인지 동물의 눈인지 언뜻 헷갈리는 두 개의 상징적인 문양. 이들에 이끌려 세상은 자연스럽게 두 가지 행위로 나뉜다. 빨려들 듯 들어서든지, 도망치듯 밀려나든지(조라 만 ‘코스모파기’).

#2. 중간은 새우다. 누구의 욕실인지 모를 공간에 박은 철제파이프에 대롱대롱 매달린 새우 두 마리. 얇고 투명한 소재로 껍질을 만들고 긴 수염까지 총총히 박아낸 대형 모형이다. 딱딱한 외피만 남기고 정작 속은 잃어버린 새우들이 여기까지 와서 어렵게 매달린 까닭은 뭔가(카시아 푸다코브스키 ‘복수’).

#3. 끝은 학교다. 여느 교실에서나 볼 수 있는 나무 책상과 의자를 옮겨 놨다. 그런데 단순치가 않다. 책상과 의자를 연결한 철근을 늘려 높이 4.4m로 키를 키웠으니. 그 사이 공간은 빈 스케치북 같다. 철근을 배배 꼬아 뭉치고 펼치기를 반복하는가 싶더니 한쪽엔 누군가의 얼굴까지 빚어냈다. 뭔가 할 말이 있는이 자리의 주인인가(페트릿 할릴라이 ‘철자법 책’).

영국 출신 작가 카시아 푸다코브스키의 설치작품 ‘복수’(2019). 누구의 욕실인지 모를 공간에 새우 두 마리를 대롱대롱 매달고 “남편을 향한 복수”란 스토리를 붙였다. 살벌한 현상에 대한 코믹한 해석이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낯선 이방인들이 서울 종로구 삼청동길에 나란히 나섰다. 여행객이라면 이상할 게 없지만 국적과 살아온 배경이 다른 미술가가 ‘패키지’로 출동하는 일은 흔치 않다.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에 마련한 그룹전 ‘척추를 더듬는 떨림’을 위해서란다. 설치·회화·조각 등 25점을 걸고 세계를 향한 유·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면면부터 살펴볼까. 솔 칼레로(37·베네수엘라), 카시아 푸다코브스키(34·영국), 페트릿 할릴라이(33·코소보), 조라 만(40·네덜란드). 테이트리버풀, 이스탄불비엔날레, 베니스비엔날레 등을 통해 국제미술계에 이름을 알려온 이들이다. 재미있는 건 이들 4인이 그간 이렇게 모인 적이 없다는 사실. 딱히 묶일 수 있는 작품세계란 것도 없다. 개성과 취향, 기법과 방식이 제각각이니. 게다가 한국은커녕 아시아에선 전시를 해본 적도 없단다. 그저 공통분모라면 이것일 터. 예술을 한다. 전통적인 형태는 아니다. 덕분에 세계를 휘젓고 다닐 수 있었고, 지금은 그중 유럽, 특히 독일 베를린을 근거지로 한다.

코소보 출신 작가 페트릿 할릴라이 ‘철자법 책’(2019). 모국인 코소보의 한 학교 책상에 새겨있던 낙서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었단다. 책상과 의자를 연결한 철근을 늘려 높이 4.4m 대형 설치작품으로 키웠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페트릿 할릴라이 ‘철자법 책’(2019)의 부분. 마치 이 자리의 주인인 양 어린 학생의 얼굴을 빚어놨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인연으로 이 공간에 함께 ‘떴을까’. 답은 역시 베를린에 있었다. 이번 전시에 이들과 동반한 플로리안 로데 셔트로데갤러리 대표가 현대미술의 중심지로 부상한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네 작가를 찾아 구성을 맞췄다는 거다. 로데 대표는 “다른 매체,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 작가들의 개성을 주목해 달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이들이 새로운 미술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10여년을 활동해왔다. 다만 각자의 스토리가 다 달라 이를 어떻게 어우러지게 할 건가가 고민이었다.”

△아프리카의 문양, 칠판에 옮겨온 열대…

거대한 커튼으로 은근하면서도 강렬하게 경계를 구획했던 조라 만이 주목한 주제는 환경이다. 당장 ‘코스모파기’(2015)란 작품이 그렇다. 케냐 해변과 수로에 버려진 이른바 ‘쪼리’라 불리는 슬리퍼가 소재라고 하니. 그 조각조각을 가는 실에 줄줄이 매달아 둔 거다. 인도양의 가장 큰 오염원이 플라스틱 슬리퍼란 것도 작가를 통해 처음 알았다. ‘방패’를 형상화한 작품도 있다. 엄밀하게 말해 방패란 형식보단 방패에 새긴 문양. 아프리카 어느 원주민이 싸움터에서나 들었을 법한 그 방패에 새긴 독특한 상징 말이다. 색과 패턴이 제각각인 이들에 작가는 ‘올리버’(2016), ‘오스카’(2016), ‘탄자’(2016) 등의 이름을 붙였다. 작가는 “표면 뒤 이면에 뭐가 있느냐에 관심이 있다”며 “초현실·초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보려 했다”고 설명한다.



조라 만이 싸움터에서 쓰던 방패에 아프리카 특유의 상징이 든 문양을 박아 제작했다. 왼쪽에는 ‘탄자’(2016), 오른쪽에는 ‘산나’(2016)란 이름을 붙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새우를 욕실에 걸어둔 이유는 카시아 푸다코브스키가 직접 설명했다. “남편을 향한 복수”라고. 스위트한 분위기가 가진 섬뜩한 반전을 노렸다는 얘기다. 작가는 세상을 이분법으로 나눌 때의 위험성, 그 때문에 뒤엉키는 정치사회적 상황 등을 표현해왔단다. 복잡한 현상은 단편으로 끝나지 않는 법. 각각의 얘기를 구조물로 이어낸 시리즈 ‘지속성 없는 없음’을 선보인다. ‘연관이 없는 것을 연결한다’는 뜻이란다. 2011년부터 한 점씩 붙여낸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욕실에 새우를 건 설치작품 ‘복수’(2019)를 비롯해 사람 없는 공간에 남긴 사람의 흔적을 더듬은 ‘대합실’(2019), 누군가의 불룩한 배를 똑 따와 인간 몸통의 철제틀에 걸어둔 ‘(리퀴드) 호스트/테스’(2017) 등을 연결했다.

카시아 푸다코브스키가 자신의 작품인 ‘지속성 없는 없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연관이 없는 것을 연결한다’는 뜻을 가진 이 시리즈는 2011년부터 한 점씩 붙여내는 작업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중 한 점인 ‘대합실’(2019)이 왼쪽에 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솔 칼레로는 고향인 라틴아메리카 문화가 서양미술계에서 어떻게 외면당해왔는지를 항변하고 싶단다. ‘엑소티시즘’(이국적 정취) 가득한 이미지나 서사를 주로 끄집어내는데. ‘너희가 라틴을 아는가’라는 식이다. 각각 가로 3m에 달하는 회화 연작 ‘남쪽의 학교’(2015)가 남미의 학교 건축물을 비평적으로 표현했다면, 아마존 우림과 과일을 칠판 한가득 분필로 그려낸 ‘아마조나스’(2017)는 열대에 대한 개념·편견을 바로잡으려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베네수엘라 출신 작가 솔 칼레로가 자신의 작품 ‘아마조나스’(2017) 앞에 섰다. 아마존 우림과 과일을 칠판 한가득 분필로 그려낸 그림. 열대에 대한 개념·편견을 바로잡으려 했다고 말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번 서울행엔 함께못한 페트릿 할릴라이는 철근이 뒤엉킨 커다란 책상 설치작품인 ‘철자법 책’(2019)에 대한 설명을 대신 띄웠다. 모국인 코소보가 내전을 겪으며 얻은 트라우마를 알리고 싶었다는 거다. 그가 철근을 휘둘러 새기려 한 의미도 이와 무관치 않다. 아이들이 학교 책상에 그린 낙서를 끄집어낸 것이라 하니. 그러곤 역사라고 했다. 한 사회가 가진 기록을 보존하는 행위가 그것 아니냐고.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모으고 전시를 기획한 플로리안 로테 셔트로테갤러리 대표가 내한하지 못한 페트릿 할릴라이를 대신해 ‘철자법 책’(2019)을 설명하고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정체성이 무기, 사회현상이 도구인 네 작가

어렴풋이 윤곽이 잡힌다. 네 작가는 세계가 가진 ‘현재의 역사성’을 쥐고 있다. 개인의 경험을 해체하고, 옛 공간을 재구성하고, 세상이 처한 척박한 현실을 뜯어내는 작업이었던 거다. 결론은 공동체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집합하는 형태. 굳이 불편하고 어려운 내용일 필요도 없고, 소란한 말과 요란한 형태가 아니어도 됐던 거다. 그저 정체성이 무기고 사회현상이 도구였던 셈. 여기에 각자의 철학과 재기, 유머와 익살을 보탠 적극성이 공감대를 얻었던 것이고.

전시를 둘러본 마무리 즈음에 물었다. “요즘 베를린 화랑가를 흔드는 어떤 유행이나 트렌드가 있습니까.” “글쎄요.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우리 작가들은 그냥 우리의 작업을 할 뿐입니다.” 유행도 타지 않고 트렌드도 입지 않았다는 그들의 작업이 과연 서울 삼청동에 제대로 스며들 수 있을지. 관전 포인트가 하나 더 생겼다. 전시는 10월 5일까지.

독일 베를린을 근거지로 활동하는 작가 4인방이 한국에서 처음 그룹전을 열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길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삼청에 펼친 ‘척추를 더듬는 떨림’ 전이다. 왼쪽부터 카시아 푸다코브스키, 솔 칼레로, 조라 만이 나란히 앉았다. 페트릿 할릴라이는 내한하지 못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조라 만 ‘코스모파기’(2015). 아프리카 케냐 해변과 수로에 버려진 이른바 ‘쪼리’라 불리는 슬리퍼를 소재로 가로 460㎝, 세로 350㎝ 규모의 대형 커튼을 제작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솔 칼레로 ‘남쪽의 학교’(2015). 고향인 남미의 시각문화를 바탕으로 영국 런던에 있는 스튜디오 볼테르의 빅토리아식 건축양식을 비평, 재해석했다고 설명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