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국민단합 계기 돼야

by논설 위원
2015.11.23 04:10:06

우리는 어제 ‘민주화 운동의 큰 별’을 잃었다.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더불어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실현한 주역이다. 비록 국가 부도 사태를 막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경제주권을 넘긴 ‘실패한 대통령’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재임 중 업적은 역대 어느 대통령 못지않다는 평가가 많다.

1954년 최연소(27세) 민의원에 당선된 후 9선 의원을 지낸 그의 정치 역정은 우리나라의 민주화 역사 그 자체라 할 만하다. 일찍이 ‘대도무문’(大道無門)을 좌우명으로 삼아 의로운 길을 고집했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직무 정지와 헌정 사상 첫 현역 의원 제명이란 고초를 겪으면서도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저항한 신념의 정치인이다. 결국 이 사건은 부마 사태로 이어져 18년 박정희 정권이 막을 내리는 단초로 작용했다.



그는 5공 때에는 23일 단식 투쟁 등으로 독재에 맞서며 대통령 직선제를 관철했고 1993년 14대 대통령에 취임해 군 비밀조직 하나회를 단칼에 척결해 문민정부의 초석을 놓았다. 경제 정의를 실현한 금융실명제와 공직문화에 새바람을 일으킨 공직자재산등록제, 지방시대를 연 지방자치제, 두 전직 대통령을 법정에 세운 역사바로세우기도 주요 업적이다. 외환위기는 노동법 개정과 부실기업 처리를 극력 저지한 야당과 노조 책임도 작지 않다는 분석이 유력한 만큼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정권 말기의 차남 국정 개입 시비는 치명적 실책이었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이어 ‘양김 시대’는 막을 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고 협력관계로 세계에서 유례없는 특수 관계”로 표현했듯이 두 사람은 민주화 동지이자 정치적 앙숙이었다. 양김의 화해가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직전인 2009년 8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병으로 비로소 이뤄진 것은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양김의 화해가 조금 더 일렀다면 민주화도 앞당기고 외환위기도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치인들은 나라의 분열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한 지금이야말로 양김의 때늦은 화해를 교훈 삼아 국민 통합에 힘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