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더 짙고, 더 넓고, 더 광활한 동해를 느끼다
by강경록 기자
2022.02.18 00:00:01
강릉 바우길 8구간 ‘산우에 바닷길’
괘방산 능선따라 안인진에서 정동진까지
| 강원도 강릉 강릉바우길 8구간인 산우에바닷길 중 가장 전망이 좋은 활공장전망대. 산 위에서 바라본 동해는 더 넓고, 짙고, 광활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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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강원)=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백두대간 동쪽 끝에 자리한 강원도 강릉. 산수가 아름다워 사시사철 많은 이들이 찾는 고장이다. 그래도 강릉하면 솔향보다 바다향이 더 짙게 느껴진다. 동해안의 긴 해안선을 따라 20여개의 해수욕장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의 뿌리를 알려주는 오죽헌도, 여행객의 발길을 불러모으는 커피거리도, 바다를 빼고선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래서인지 강릉의 바다는 그 곁을 쉽게 내준다. 사람들은 쉬이 그 곁에 다가가 위로받는다. 그것만으로 부족하다면 바다 어깨를 옆에 두고 걷는 일이다. 짙푸른 동해를 옆구리에 두고 걷다보면 지독히도 괴롭히던 고뇌도, 고심도, 모두 눈 녹듯 사라진다. 좀 더 색다른 방법은 산 위에서 동해를 내려다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동해는 더 짙고, 더 넓고, 더 광활하다. 산을 오르고 내리는 즐거움은 덤이다. 안인진역과 정동진역 사이에 자리한 괘방산(339m) 능선을 따라 걷는 길이 딱 그렇다.
강릉 시내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안인진(安仁進)이 있다. 작은 포구 마을이다. 이름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을이지만, 26년 전에는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안인진 포구 남쪽 1.5km 지점에서 북한 잠수정이 고깃배의 그물에 걸려 고립됐고, 그때 상륙한 공비들은 괘방산을 거쳐 칠성산으로 도주했다. 공비들은 소탕됐지만, 이 과정에서 민간인과 우리 군의 상당수도 희생됐다. 이 사건 후 강릉시와 지역 산악인들은 이 산길을 정비해 안보체험등산로를 만들었다. 지금은 ‘산우에 바닷길’로 불리는 길이다.
산우에 바닷길은 여러 이름이 있다. 동해안을 따라 이어져 있어 ‘해파랑길 38코스’, 강릉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고 해서 ‘바우길 8구간’으로도 불린다. 그중 이 길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이름은 역시 ‘산우에 바닷길’이다. ‘산우에’라는 말은 ‘산 위에’라는 뜻의 강원도 사투리. ‘산 위에 만들어진 바닷길’이라는 뜻이다. 산 위에 등산로답게 생명력 넘치는 나무가 울창하지만, 길을 걷는 사이사이 푸른 동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길의 시작은 안인진 괘방산 등산로 주차장. 나무 계단을 올라서서 괘방산 능선을 따라 걷다가 정동진으로 내려오는 코스다. 약 9.4km의 길이로, 난이도는 중간 정도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해안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산 능선을 따라 걸으며 동해의 아름다운 풍광과 내륙의 대관령 산세를 모두 볼 수 있어 등산객에게 인기가 높은 코스다.
| 강원도 강릉 강릉바우길 8구간인 산우에바닷길 초입에서 바라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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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부터 나무계단이 길고 높게 이어져 있다. 이 계단은 쉼터까지 가파르게 이어져 이후에는 완만한 오르막이 활공장 전망대까지 이어져 있다. 그래도 경사가 완만해 크게 힘들이지 않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다.
한참을 숲을 뚫고 나오자 마침내 산의 지붕 위로 올라선다. 능선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사방이 각각 다른 특색을 갖는다. 걷고 있는 길의 방향으로 바라보면 산의 등줄기가 튀어나온 모습이 마치 거대한 짐승의 척추처럼 느껴진다. 서쪽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진 푸른 동해의 모습이 끝없이 이어져 있다. 동쪽으로는 대관령의 선자령 능선이 무한한 모습으로 버티고 있다.
능선을 따라 걷다 활공장 전망대에 다다랐다. 해발 290m의 낮은 전망대지만, 이곳은 전국에서도 유명한 패러글라이딩 명소다. 바다와 산 위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져서다. 특히 산의 정기와 바다의 기백을 함께 받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다.
| 강릉바우길 8구간인 산우에바닷길에서 바라본 하슬라아트월드와 동명해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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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쾌한 풍광을 즐기고 다시 걸음을 서두른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던 언덕에서 내려와 다시 숲속으로 들어간다. 해풍을 맞아 가지각색으로 꺾여 자란 소나무들이 조금은 으스스한 느낌으로 길을 안내한다.
이 길은 안내와 정비가 잘 돼 있는 편이다. 중간중간 표지판이 많아 길을 헤맬 일도 거의 없고, 혹여나 잃게 되더라도 쉽게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다. 또 걷는 대부분 구간이 왼쪽으로는 바다를 끼고, 오른쪽으로는 울창한 숲을 가로막고 있다. 혼자 걸어도 크게 무리가 없을 정도다.
눈 덮인 고려성지를 지나자 어느새 삼우봉이다. 이 삼우봉에서 내려다보는 바다 풍경도 아주 시원하고 장쾌하다. 삼우봉을 지나 조금 더 가면 길 오른쪽 안쪽에 괘방산 정상이 있는데, 정상에는 정상석이 하나 있을 뿐 인상적인 풍경은 없다.
| 강릉바우길 8구간인 산우에바닷길에서 만날 수 있는 당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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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 후 2시간여가 흐르면 방송 통신탑이 있는 고지다. 이곳을 지나가면 한동안 나무가 없는 능선 위를 걷게 되는데, 그 아래로 정동진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활공장 전망대, 삼우봉과 함께 산우에 바닷길 최고의 풍경이다.
정동진을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가는 길 도중에 마을로 내려가는 길들도 드문드문 나타난다. 그중 ‘동명낙가사’라는 사찰로 향하는 길도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지어진 사찰로, 재미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사찰에서 공부하던 수학도가 새벽에 산을 올라 불을 밝히고, 기도하면 급제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일까. 해마다 입시철이면 이 사찰을 찾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심지어 괘방산 산속에도 서낭당을 지어 기도를 올렸다. ‘산우에 바닷길’을 걷다 보면 마주하는 당집이다.
| 강릉 바우길 8구간인 ‘산우에 바닷길’ 종점인 주문진해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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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분위기의 당집을 나와 소나무 숲길을 지난다. 여기서부터는 단순한 산길이 이어진다. 오직 정동진 이정표를 따라 길은 이어지는데, 중간 중간 만나는 이정표에서는 바우길에 대한 소개도 적혀 있다. 바우는 강원도 말로 ‘바위’. 강원도와 강원도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 바우’라고 부르는데, 바우길 역시 강원도의 자연적이고 인간친화적이 트레킹 길이다. 183고지를 올라서면 정동진의 랜드마크 ‘썬 크루즈 리조트’의 뱃머리가 동해를 향하고 있다. 동해의 거친 파도를 헤치며 달리는 듯한 그 모습이 시원하고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이제부터는 내리막길이다. 미끄러운 산길을 한발한발 조심스레 걷다 보면 정동진에 내려선다. 정동진 역 모래시계 공원을 지나면 신봉승 시인이 쓴 시를 돌에 새긴 ‘정동진 시비’가 여행객의 발길을 붙잡는다. “벗이여 / 바른 동쪽 정동진으로 / 떠오르는 저 우람한 아침해를 보았는가 / 큰 발원에서 / 작은 소망에 이르는 / 우리들 모든 번뇌를 씻어내는 / 저 불타는 태초의 햇살과 / 마주서는 기쁨을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