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윤민하 기자
2021.05.06 00:30:37
명칭 공모전 열고 이미 부르던 이름 선정 반복
응모자 기만·행정력 낭비라는 비판에도 지속
유사사례 전국서 반복... 반짝 논란에 그쳐
전문가 “홍보 노리는 대신 공모 취지 확실히 해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진행하는 ‘명칭 공모전’이 끊임없는 실효성 논란을 빚고 있다. 시설물이나 장소에 붙일 이름을 공모한 뒤 친숙하다는 이유로 그동안 불러 왔던 이름을 다시 선정하는 식이다. 하나마나 한 공모전에 예산과 행정력 낭비라는 지적이 뒤따르지만 지자체는 ‘가칭도 후보 중 하나’라는 원론적 해명을 내놓고 있다.
이를 두고 독창적인 명칭 공모가 아닌 홍보 효과를 노린 근시안적 행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허술한 공모가 정책 신뢰도를 낮춰 결국 향후 행정에 혼선을 더한다는 우려도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기관·지자체 등 공모전을 여는 주체의 목적의식이 부족하다는 점을 원인으로 꼽았다. 대안으로는 공모 단계부터 가칭을 제외할 것과 선정 과정의 시민 참여 확대 등을 제시했다.
답 정해져 있는 ‘답정호 출렁다리’...논산시 명칭 공모전 논란
충남 논산시는 지난 3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탑정호 출렁다리 명칭 공모전’울 진행했다. 동양 최대 600m 길이의 탑정호 출렁다리를 국내 관광 명소로 자리매김하려는 취지였다. 시는 △적합성 △대중성 △창의성 △발음용이성 △계속성 5개 항목을 심사기준으로 제시했다.
공모 기간 3주 동안 3500여개 명칭이 접수됐으나 지난 27일 공개된 심사 결과는 논산 시민과 응모자들을 황당케 했다. 실제 시민들이 불러 오던 가칭과 유사한 ‘논산탑정호출렁다리’와 ‘탑정호출렁다리’가 각각 금상(1등)과 동상(3등)을 받았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시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을 통해 ‘말장난 공모전’이라며 이번 공모전 결과를 비판했다. 수상작을 독창적으로 볼 수 없다며 심사 점수와 회의 내용 등 세부 사항 공개를 요구한 것.
게시판에 글을 올린 한 작성자는 “당선작 명칭이 애초 공모전의 제목인 ‘탑정호 출렁다리’에서 바뀐 게 없다”며 “내정자가 정해져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논산시는 외부 전문가와 시민대표 등으로 구성한 자문단이 정상적인 심사 과정을 거쳐 내린 결정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시 관계자는 심사 과정 공개나 선정된 명칭을 사용할지 여부에 대해 “결정된 게 없다”며 말을 아꼈다.
비판도 그때뿐? 가칭 선정 사례 반복
명칭 공모전을 연 후 기존 가칭에 상을 주는 경우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전국서 유사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지만 온라인을 중심으로 반짝 논란에 그친 뒤 반복되는 모습이다.
지난 1월 국토교통부와 서울시·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합동으로 진행한 ‘용산공원 이름 공모전’에선 9401건 응모작 중 ‘용산공원’이 뽑혔다.
용산공원 측은 “공모지침 상 기존 명칭은 심사 제외 대상이므로 ‘용산공원’은 시상에서 제외한다”며 2등부터 상금을 지급했다. 용산공원이 기존 명칭임에도 1등으로 선정했다고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사용해 국민에게 친숙하고 부르기 쉽다는 이유를 댔다.
지난해 11월 서울 노원구는 “주민들의 공간에 맞는 참신하고 특색있는 이름을 선정하기 위한 갤러리 명칭 공모전을 실시한다”며 ‘경춘선숲길 갤러리’ 명칭 공모를 열었다. 3명이 공동수상한 최우수상은 가칭과 동일한 ‘경춘선숲길 갤러리’였다.
관악구청도 지난 3월 가칭 ‘관악구가족문화복지센터’ 명칭 공모전을 진행해 ‘관악구가족문화복지센터’를 3개 우수작 중 하나로 뽑았다.
주최 기관은 발표 직후 비판에도 ‘가칭도 후보 중 하나’, ‘정상적인 절차를 걸쳐 선정된 결과’라는 입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심사 위원 명단과 예산 등 세부 사항을 투명하게 밝히라는 의견이 있지만 개인정보 공개가 어렵다는 이유로 이뤄지지 않는다.
실제 지난 3월 국민권익위원회(국민권익위)가 발표한 ‘공공분야 공모전 실태조사 및 국민의견 수렴 결과’에 따르면, 공공기관 공모전 불만 요인 중 ‘심사·검증 과정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48.3%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명칭 공모전 뒤 홍보 목적...취지 대한 고민은 부족
반복되는 사례를 두고 홍보가 실제 목적이나 지자체가 이를 명칭 공모전이라는 형식 뒤 교묘히 감추고 있다는 전문가의 해석이 나온다.
시민들은 참신한 명칭을 제정하겠다는 공식 목표를 그대로 받아들이지만 실제 지자체는 홍보 효과를 노리고 공모전을 열기 때문에 미리 정해 놓은 가칭이 선정되는 등 잡음이 생긴다는 것.
권혁주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정부나 지자체가 공식적으로는 명칭 공모전이라는 형식을 내세우지만 실제 목표는 홍보”라며 “단기적인 효과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이같은 불일치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위축시켜 결국 행정에 혼란이 생긴다”고 말했다.
명칭 선정 과정에서 지자체가 목적의식이 부족한 채로 공모 결과를 일차원적으로 해석한 결과라는 의견도 있다.
홍형득 강원대 행정학과 교수는 “새 명칭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문하면 당연히 익숙한 이름의 숫자가 많을 것”이라며 “특정 주제에 대한 자료 조사 데이터를 기계적으로 해석해 오히려 상식 이하의 결과가 나온 게 아닐까 싶다”고 가칭이 선정되는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 “왜 명칭을 새로 만들어야 하는지 근본적인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공모전을 열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홍보 효과 및 대중 친화력을 고려했을 때 가칭을 뛰어넘는 수상작이 나오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다. 응모작의 내용과 수준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
김용훈 국민정치경제포럼 대표는 “생소하거나 외국어가 혼재된 정체성 없는 이름이 응모될 경우 그동안 인지도가 쌓인 가칭을 제치기 어렵다”며 “지자체마다 비슷한 행정·문화 기능을 위한 이름을 공모하기 때문에 (이미) 유사한 명칭이 상존한다”고 말했다.
전문가 “시민 참여 늘려 자체 검증해야”
전문가들은 대안으로 처음부터 가칭이 선정되지 않도록 공모 지침을 만들 것과 선정 과정에서 시민 참여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공모 취지를 명확히 할 것도 주문했다.
김 대표는 “지자체가 가칭을 반복하는 이름을 뽑지 않는 것과 시민 투표를 활용해 해당 이름의 유사성을 검증하는 방안이 있다”고 “명칭에 대한 시민 투표를 실시하면서 제보를 함께 받아 응모자가 (명칭을) 자체 검증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홍 교수는 “명칭 공모전도 기획을 통해 시행되는 하나의 사업”이라며 “‘안 되면 말고’ 식이 아닌 명칭 변경이나 제정을 왜 진행해야 하는지 명확한 생각을 가지고 진행해야 한다”고 전했다. 공모전의 취지를 보다 공고히 할 필요가 있다는 것.
한편 국민권익위는 공공기관 공모전 운영 실태조사 결과 나타난 문제점과 국민의견 수렴 결과를 토대로 공정하고 투명한 공모전 운영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지난 1월 한 예비군 장교가 각종 공공기관 공모전에서 표절 자료로 수상한 사실이 드러난 게 계기가 됐다.
권익위 관계자는 “상반기 중 (공공기관) 공모전 관련 총괄 운영규정·현황 검색 시스템 등 제도 개선 방안이 나올 것”이라고 전했다.
/스냅타임 윤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