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상한 그림? 난 옷걸이에 걸어 판다"
by오현주 기자
2018.09.03 00:12:01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노상호 ''더 그레이트 챕북Ⅱ'' 전
SNS·구글링 통해 이미지 무작위 수집
매일 3∼4점씩 드로잉 거쳐 재편집해
콜라주 걸개그림, 수채한 옷걸이용 등
"무의식적 이미지 소유·소비행태 담아
매장 둘러보듯 쉽고 편하게 즐겼으면"
| 작가 노상호가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전시한 자신의 대형 걸개그림 ‘더 그레이트 챕북Ⅱ’ 옆에 섰다. 길이 270㎝짜리 화면에는 온갖 인물군상이 등장한다. SNS에서 수집하고 구글링을 통해 무작위로 뽑아낸 이미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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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도도한 표정의 여인 옆에 장난기 가득한 청년의 과장된 몸짓이 보인다. 비키니차림의 여인도 등장하는데 그 아래로는 난데없이 한무더기의 검은 정장을 입은 일행이 지나간다. 가로 220㎝ 길이 270㎝짜리 걸개그림에 등장한 온갖 군상. 그런데 말이다. 족히 수백 컷은 모았을 듯한 대형 그림판이 정작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가 없다.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기승전결의 맺고 끊음도 없다. 제각각 의미는 가졌겠으나 도통 섞이질 않는다.
당황스러운 건 이뿐만이 아니다. 언뜻 봐도 300~400개는 돼 보이는 옷걸이가 심상치 않다. 가지런히 정리돼 나란히 걸린 옷걸이에는 드로잉이 한 점씩 들었으니. A4 크기에 하나씩 비닐을 씌워 낱개포장한 그림의 내용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걸개그림의 장면 하나하나를 잘라낸 형태라 할까.
이 모든 광경은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옛 공간사옥)에 펼쳐졌다. 젊은 작가 노상호(32)가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The Great Chapbook)Ⅱ’란 타이틀 아래 늘어놓은 전경이다. 예전 소극장으로 쓰던, 붉은 벽돌이 촘촘히 박힌 공간의 특성까지 더해 전시장은 차라리 공연 중인 거대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
|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 펼친 노상호의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Ⅱ’ 전경. 붉은 벽돌이 촘촘히 박힌, 옛 공간사옥 시절 소극장으로 쓰던 공간의 특성까지 더해 전시장은 차라리 공연 중인 거대한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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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널린 이미지로 매일 3~4점 ‘생산’
얼핏 눈치챘겠지만 노 작가는 흔히 말하는 고상한 미술을 ‘지양’한다. 최소한 그의 작품세계에는 예술성을 위한 고고한 노력은 없단 소리다. 노 작가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소스는 인터넷에서 나온다. 인스타그램·페이스북 등에서 수집하고 구글링을 통해 무작위로 뽑아낸다. 그렇게 거둬 모은 이미지를 다시 드로잉해 작품화하는데, 매일 3~4점씩은 보통이란다. 걸개그림 4점을 포함해 전시장에 나온 작품 수가 1500여점. 올해 1월 1일부터 작업한 데서 골라낸 게 이 정도라니, 작업량을 섣불리 가늠할 수조차 없다.
방식은 이렇다. 얇은 먹지를 대고 모사하듯 이미지를 따낸 뒤 다시 변형하고 재편집해 제작한다. 판화를 전공한 작가다운 작업이라고 할까. 이 과정에서 크기도 조정하고 다른 이미지를 섞어내기도 한단다. 작품의 형태는 이후에 결정한다. 먹지드로잉 위에 수채물감으로 가볍게 색을 입혀 옷걸이용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이들 이미지를 콜라주해 캔버스천에 수용성 유화로 채색한 뒤 걸개그림으로 만들기도 한다. 걸개그림 속 이미지는 조각조각 떼어내 작은 액자에 들이기도 한다.
| 노상호가 수집하고 드로잉하고 편집한 이미지들. 걸개그림에서 조각조각 떼어낸 것을 작은 액자에 들였다. 이번 전시에 1000여점이 나왔다(사진=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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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과연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란 게 있는가. 이에 대한 노 작가의 철학은 확실하다. “주제는 태도다. 팩트를 보이려는 게 아니다. 이미지를 대하는 태도를 보이려는 거다. 원본은 중요하지 않다. 인터넷에 수없이 존재하는 이미지는 그림파일이 되는 순간 가벼워지지 않나. 계속 복제돼 갈 뿐이고. 난 그 파편화한 형태만 보이려는 거다.” 결국 요즘 사람들이 이미지를 대하는 방식을 보이려 했다는 얘기다. 무의식적으로 소유하고 소비하는 그대로.
또 하나 생기는 의문. 왜 굳이 옷걸이였나. “매장을 운영하는 콘셉트로 생각하면 된다. 의류매장에 걸린 옷처럼 전시한 그림을 그냥 편하게 구경했으면 좋겠고. 그러다가 한 점씩 사갈 수 있으면 좋겠고.” 그림에 대한 아우라도 없고 관념도 없다는 고백이 뒤따른다.
| 전시장 벽면을 빙 둘러싼 옷걸이들. 가지런히 정리돼 나란히 걸린 옷걸이에는 노상호 작가의 드로잉이 한 점씩 들었다. A4 크기에 하나씩 비닐을 씌워 낱개포장한 그림의 내용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걸개그림의 장면 하나하나를 잘라낸 형태라 할까(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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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족히 300∼400점은 돼 보이는 옷걸이 드로잉. 노상호 작가는 마치 일기를 쓰듯 SNS와 구글링을 통해 이미지를 수집한 뒤, 먹지드로잉 위에 수채물감으로 가볍게 색을 입혀 옷걸이용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캔버스천에 콜라주해 수용성 유화로 채색한 뒤 걸개그림으로 만들기도 한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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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값싸게 널리 공급하는 ‘챕북’처럼
가수 혁오와의 인연이 만든 그림 한 점은 덤으로 볼 수 있다. ‘어떻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2018)란 다소 긴 제목의 작품은 혁오밴드의 동명앨범 재킷에 들어간 이미지를 모은 거란다. 길이 52㎝에 폭 200㎝에 달하는 그림의 작업방식도 다르지 않았다. “구글에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검색했더니 수천 건이 올라오더라. 그중 적당한 이미지를 골라 한 화면에 구성했다.” 아직 완성을 보지 않은 작품이다. 앨범이 이어지는 한 그림 또한 이어질 테니.
전시제목으로 따온 ‘챕북’ 역시 노 작가의 세계를 반영한다. 챕북은 한마디로 ‘싸구려책’이란 뜻이다. 작은 책자에 가벼운 소설 따위를 찍어 대량으로 팔던 책. 노 작가의 챕북이 다른 점이라면 텍스트 대신 이미지를 넣었다는 정도랄까. 인쇄물의 품격보단 광범위하게 뿌리는 데 치중한다는 점에선 다를 게 없다. 2016년 개인전 ‘더 그레이트 챕북Ⅰ’에 이은 이번 ‘챕북Ⅱ’도 대단한 의미는 없다. 게임이나 영화처럼 버전을 이어간다는 외에는. 결국 소비행태란 소리다.
| 노상호의 ‘어떻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까’(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2018). 가수 혁오와의 인연으로 탄생한 작품이다. 혁오밴드의 동명앨범 재킷에 들어간 이미지를 모았다. 폭이 2m에 달하는 그림은 앨범이 만들어질 때마다 더 늘어날 모양이다(사진=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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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보일 뿐 판단은 알아서들 하시오’라고나 할까. 감히 손끝도 댈 수 없던 미술품을 노 작가의 전시에선 손을 대야만 볼 수가 있다. 옷걸이를 하나씩 제쳐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아야 하니. 이런 파격적인 감상법이 누구에게는 즐거울 수도 누구에게는 곤욕일 수도 있단 얘기다. ‘소비하는 양만큼 생산해낼 뿐’이란 경제논리도 먹힌다. 세상이 보기를 원하는 이미지를 감당하려면 방법이 없질 않은가. 최대한 빠르게 많이 보여주는 것 외에는.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전시다. 작가는 쉽고 편한 자리를 의도했다지만. 전시는 내년 2월 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