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임기자칼럼] '러버덕'은 되고 '슈즈트리'는 안된 이유

by오현주 기자
2017.06.15 00:15:00

[이데일리 오현주 선임기자] 비운의 헌 신발 3만켤레가 소임을 마치고 퇴장했다. 헌신짝 취급을 제대로 받았다. 두 번 버려진 셈이니까. 3만켤레 중에는 한때 우리 발에 딱 붙었던 것도 있을 텐데. 추억 한 번 떠올릴 새 없이 그냥 싸잡혀 흉물이 돼야 했다. ‘서울로 7017’ 개장기념 조형물로 서울역 광장에 섰던 17m 대형설치작품 ‘슈즈트리’는 9일간의 정해진 전시일정을 채운 즉시 철거용역의 손에 뜯겨 나갔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슈즈트리’는 예고도 없이 공공미술에 관한 뜨거운 논쟁을 불러왔다. 크게 두 갈래였다. ‘예술이냐 흉물이냐’는 대주제 아래 ‘예술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몰이해’를 탓한 것이 하나, ‘1억 4000만원짜리 세금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다른 하나.

비난을 부른 건 비호감의 외형 탓이 컸다. “예술은 무슨? 악취 나는 넝마”라는 혹평이 끊이질 않았다. 1억 4000만원을 들인 조형물이란 얘기가 돌자 여론은 다시 들끓었다. “아까운 세금으로 재활용쓰레기장을 만들었느냐. 그것도 달랑 9일간 보이려고?” 예술표현의 자유를 들이댄 쪽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거부감이 들어도 예술은 예술”이라며 이해가 부족한 대중의 몰지각을 쏘아붙였다.

이 정도의 논란을 부른 공공미술이 예전에 있었나. 예술이 뉴스의 중심이 된 것이라곤 ‘예술이냐 외설이냐’가 전부였을 텐데. 담론의 폭을 넓혔다고 반가워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현대미술과 대중의 간극을 확인한 셈이니. 그 지점에서 소비문화를 돌아보고 환경보호를 강조하려 했다는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사실 작가의 의도는 나무랄 데가 없다. 근대부터 현대까지 서울역은 혼돈의 시작점이었다고. 그 방향성을 우리의 신발로 말하려 했다고.



잠깐 장면을 바꿔보자. 2014년 등장했던 ‘러버덕’은 공공미술의 불모지라 할 한국서 성공사례로 꼽힌다. 네덜란드 공공미술작가 플로렌타인 호프만이 서울 잠실 석촌호수에 띄운 1t짜리 초대형 노란 고무오리는 한 달간 500만명을 끌어모았다. 가장 큰 요인은 대중을 위로했다는 것. ‘마케팅 수단’ ‘폭발 위험’ 등 냉소가 없던 건 아니지만 ‘치유’를 강조한 작가의 뜻은 제대로 먹혔다. 그에 힘입어 석촌호수 일대에는 ‘판다’ ‘슈퍼문’에 이어 최근 백조가족 ‘스위트 스완’까지 불려 나왔다.

맞다.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하지만 추한 것을 외면하는 것이 예술인 것도 아니다. 고급스러워야 한다는 것도 편견이다. 여기에 개인의 취향이란 건 더 강력하다. 모든 이들을 똑같이 만족시킬 작품은 있을 수가 없다. 인내가 부족했다는 것도 인정하자. 애써 쌓아올린 작가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 예술이란 게 장소는 가려야 하는 건 분명하다. ‘러버덕’은 석촌호수에 둥둥 떠 있는 게 맞았다. 광화문광장에서 세종대왕을 마주 보고 놓였다면 그 또한 힐난의 대상이 됐을 거다. 뒤집어서 ‘슈즈트리’가 어느 미술관에 설치됐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거다. 시인 안도현이 말한 ‘연탄재’가 후딱 떠오른다. 한 번도 누구를 뜨겁게 한 적이 없으니 함부로 차버려선 안 된다는 연탄재. 그런 연탄재도 서울역 앞에 폭포처럼 쌓여 있다면 다른 얘기가 될 터.

헌 신발에 마음이 쓰이지 않는 사람은 없다. 굽이 닳은 낡은 구두, 짝 잃은 운동화는 가슴을 울린다. 작가는 “설치미술의 낯섦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으로 진단했지만, 천만에. 결국 그 좋은 소재를 낯설게 만들어서다. ‘슈즈트리’는 망했다. 대중의 이해를 얻지 못한 탓이 아니다. 마음을 얻지 못한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