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강종구 기자
2006.06.20 07:00:00
은행들 "바꿔달라" 한국은행 "바꾸자"
금융감독원 "구체적 계획 없다"
[이데일리 강종구기자] 은행이 단기부채 상환능력을 충분히 쌓도록 하기 위한 유동성비율의 규제수위를 낮춰달라는 은행들의 요구가 높은 가운데,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이 제도개편에 대해 서로 딴말을 하고 있어 혼란이 일고 있다.
한국은행에서는 현재의 유동성비율 규제로 인한 폐해가 커 개선이 불가피하고, 감독당국에서도 제도변경을 추진하고 있다고 하는 반면 당사자인 금융감독원에서는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지난달 16일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주재하는 금융협의회에 참석한 국내 은행장들은 현재의 유동성비율 규제가 너무 엄격하다며 개선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정리했다.
은행들이 기업에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자금을 공급해 주지 못하고 단기대출 위주로 흐르고 있는데, 그 원인중 하나가 현재의 유동성비율 규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현 제도상 은행들은 매분기말 기준으로 3개월 이내 유동성자산을 3개월이내 유동성 부채의 100%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권고비율은 105%). 대차대조표상 모든 자산 부채를 포함하며 난외에 기록되는 파생상품거래중 잔존만기가 3개월이하인 자산부채도 규제 대상이다.
한은에 따르면 은행장들은 "기업에 장기 안정적인 자금공급을 위해서는 신용평가 등 리스크관리 능력을 계속 확충해야 한다"고 자성하면서도 "지나치게 엄격한 유동성비율 규제를 완화하고 아울러 대출채권 유동화를 활성화할 수 있도록 시장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은의 한 고위간부는 "은행장들이 금융협의회에서 유동성 비율을 완화시켜야 한다고 얘기한 것은 작년에 박승총재 시절에 이어 벌써 두번째"라며 "자산부채 구조를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유동성비율을 맞추기 위한 사회적 비용도 적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장에 있는 은행 담당자들은 훨씬 강한 어조로 현재의 유동성비율 제도가 갖는 문제의 심각성을 성토하고 있다. A은행 발행담당자는 "요즘 6월말 유동성비율을 맞추기 위해 은행들마다 난리"라며 "유동성비율을 100% 이상으로 맞추려면 3개월이내 부채는 줄이고 현금이나 시장성 유가증권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장기 은행채나 양도성예금증서(CD)를 발행해 자금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분기말만 지나면 아무 의미도 없는 유동성비율 때문에 각 은행 발행담당자들이 CD나 은행채 발행일정을 잡느라 보통 애를 먹는게 아니다"며 "금리에 관계없이 우선 발행을 하는 게 중요하고, CD나 은행채 수요자들도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분기말이 되면 좀 더 높은 금리를 요구해 온다"며 고충을 토로했다.
한국은행은 현재의 유동성 비율이 너무 엄격한데다 은행이 장기대출을 꺼리는 이유가 되고 있다는 입장이다. 가계 대출이 주택담보대출 위주로 점차 장기화됨에 따라 유동성비율을 맞추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기업대출 만기를 짧게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정길영 한은 금융안정분석국 은행연구팀 차장은 "금융위기 이후 금융당국은 은행들의 적정 유동성 확보를 유도하기 위해 단기부채보다 단기자산(단기대출, 시장성 유가증권 등)을 더 많이 보유하도록 규제해 왔다"며 "회사채 발행 위축 등으로 유가증권 보유비중이 저하되고 가계대출 만기가 길어지고 있어 기업대출을 단기로 운용하는 것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은에 따르면 3년초과 분할상환방식의 주택담보대출 취급비중은 지난 2001년중 7%에 불과했지만 지난해에는 63%로 크게 높아졌다. 반면 기업대출은 1년이내 단기대출 비중이 77%에 이르고 평균잔존만기가 16개월로 미국의 27개월이나 유로권(계약만기기준)의 55개월에 비해 현저히 짧다.
정 팀장은 "경기하강기에 대출 만기연장이 원활하지 못하면 신용경색이 촉발되고 이에 따라 실물경기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을 증폭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단기 시장금리에도 교란요인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정대영 한은 금융안정분석국장은 "분기말을 앞두고 CD와 은행채 발행이 크게 늘었다가 다음 분기초에 한꺼번에 만기가 돌아오는 일이 반복되면서 단기금리에 교란요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한은은 현재의 유동성비율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며 두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유동성자산을 유동성부채 대비 100% 이상으로 하는 현재의 방식 대신에 단기부채의 일정액을 무위험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하도록 바꾸는 것이 그중 하나. 무위험 현금성 자산에는 시재금, 국채, 통안채 등이 포함된다.
지난해말 현재 일반은행이 보유하고 있는 이들 자산의 규모는 시재금 3조원, 한은당좌예금 15조원, 국채 39조원, 통안증권 47조원 등 총 104조원으로 3개월 이내 단기부채 267조원의 40% 수준이다.
또 다른 대안은 유동성비율 규제를 3개월 기준으로 할 것이 아니라 1개월로 단축하자는 것이다. 분모가 되는 부채가 줄어들기 때문에 은행들 입장에서는 부담이 덜하고, 대출단기화에 미치는 영향도 최소화할 수 있으며, 실효성도 낫다는 것이다. 또한 장기적으로는 유동성비율을 직접 규제하기보다는 은행들이 내부적으로 자체 관리하고, 감독당국은 감시감독을 강화하는 쪽으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견해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외국의 경우에는 은행들이 하루, 1주일, 10일 단위로 내부적인 유동성관리 체계를 갖고 있다"며 "3개월은 사고가 나도 몇번이 날 수 있는 시간인데다, 지금처럼 분기말만 맞추면 되는 규제는 실효성이 없다"고 지적했다. 예금인출 등 위기가 발생했을 경우 은행의 유동성 상황은 한달이면 판단을 하고도 남을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한은은 금감원에서도 이같은 문제를 알고 있으며 현재 제도변경이 추진중이라고 밝혔다. 이를 위해 지난해말과 연초를 즈음해 태스크포스(TF)가 구성됐고, 각 은행과 전문가들의 의견수렴까지 거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금융감독원에서는 사실과 다르다며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유동성비율 규제변경과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장현기 금감원 은행감독국 경영지도팀장은 "TF를 구성해 유동성비율을 바꾼다는 한은 얘기가 어떤 근거인지 잘 모르겠다"며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바꿀 게 있으면 바꾸는 것이고, 현재 `한다 안한다`라고 할만한게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TF를 구성한 적은 없고 연초에 은행들과 회의를 몇 번 한 적이 있으며 이 때 유동성비율에 대해서도 서로 이야기 했다"며 "은행들이 유동성비율을 완화해 달라고 건의를 한 자리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다만 "은행들이야 규제를 풀어 줬으면 좋겠다는 게 만고의 진리"라며 "유동성비율과 관련해 현재로서는 일정을 포함해 구체적인 계획이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은 관계자는 "금감원이 유동성비율 개선 검토하고 있는 것은 맞다"며 "다만 신바젤협약 관련 문제나 주택담보대출 등 급한 일들이 있기 때문에 지연될 수는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다른 한은 관계자는 "지난해말에 은행들 요구가 많아, 은행 건의사항 등을 기초로 개선을 연구했던 걸로 알고 있다"며 "금감원도 개선의 방향에 대해서는 당연히 알고 있지만, 은행 자산운용에 직접 영향을 주기 때문에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