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을 밤 빛의 향연… '백제의 숨결'을 불어넣다.
by강경록 기자
2022.09.16 00:00:00
전북 익산 '미디어아트 페스타'를 가다
태평성대 바라는 백제 무왕의 마음 표현한
'탑의 나라 소망을 쌓다' 공연 몰입감 최고
허준수 작가 "시간·공간 초월한 희망 느끼길"
'물방울 정원' 'I·Story·U' 등 작품 곳곳에
재미·환경 생각한 그린 페스...
| 전북 익산 금마면에 자리한 미륵사지. 백제 최대 가람(사찰) 터인 미륵사지는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로 유명한 백제 무왕 재위 40년, 백제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됐다. 백제 사찰 중 창건 설화가 자세히 전해지는 것은 미륵사가 거의 유일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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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전북)=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전북 익산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4구체 향가 ‘서동요’의 고장이다. ‘서동요’는 백제 무왕인 서동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의 사랑을 노래한 곡. 이 노래의 주인공인 무왕은 백제 법왕이 재위 2년 만에 숨을 거두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익산 땅에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찰과 새로운 왕궁을 건설해 백제 부흥을 꿈꿨다. 하지만 백제의 운명이 야속하게 끝이 나면서, 그의 꿈도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로부터 약 1500년이 지난 후, 이 땅에 다시 무왕의 꿈이 영글고 있다. 그 바탕에는 ‘2022 익산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페스타’가 있다. 이 행사는 익산시와 문화재청, 전라북도가 공동 주최했다. 문화재청이 ‘2022년 세계유산 미디어아트’를 올해 9~11월 전국 8개 지자체에서 선보이는 행사로 첫 포문을 익산에서 연 것이다.
공주·부여·익산. 세 곳의 공통점은 백제의 옛 수도였다는 것. 또 다른 공통점은 유네스코가 이 세 곳을 세계문화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삼았다는 것이다. 한반도 초기 삼국 중 하나인 고대 백제 왕국의 찬란했던 문화전성기를 대표하는 이곳들을 세계가 인정했다는 의미다.
특히 익산의 미륵사지는 백제의 역사에서도 의미가 남다른 곳이다. 미륵사지는 익산 금마면에 자리한 백제 최대 가람(사찰) 터다. 미륵사는 ‘삼국유사’의 서동요 설화로 유명한 백제 무왕의 재위 40년, 백제 왕후의 발원으로 건립됐다. 동아시아 최대 규모의 사역을 자랑한다. 삼국유사에는 “하루는 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례했다. 이에 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지으면 좋겠다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하니, 신력으로 하룻밤 새 산을 헐어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삼회의 모습을 본떠 전(殿)과 탑(塔)과 낭무를 각 세 곳에 세우고, 사찰 이름을 미륵사라고 하였다. 지금도 그 절이 남아 있다.”라는 창건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 사찰 중 창건 설화가 자세히 전해지는 것은 미륵사가 거의 유일하다.
|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에서 내달 3일까지 ‘2022 익산 미륵사지 미디어아트 페스타’가 열린다. 미륵사지는 유니스코 등재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하나다. 미륵사지 석탑(국보11호)은 무왕 때 건립한 것으로 현존하는 최대 석탑이다. 미륵사지 등 동·서탑을 배경으로 펼쳐진 드론 라이트 쇼 ‘백제 헤리티지 드론 in 익산’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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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배치는 돌로 된 동탑과 서탑, 그리고 그 가운데 목탑 및 탑 북편에 금당의 성격을 가진 건물이 하나씩 세워진 ‘삼탑삼금당’ 형식이다. 이것을 복도(회랑)로 구분한 매우 특이한 배치를 하고 있다. 특히 미륵사지 석탑은 현존하는 동아시아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됐다. 석탑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초기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는 고대 건축의 실제 사례로써 그 역사적 가치가 높아 국보로도 지정됐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중에는 9600점 상당의 사리장엄 유물이 봉안 당시의 완전한 형태로 출토됐다. 이 유물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해 제작한 것으로, 이 발굴을 통해 탑의 제작 시기 및 미륵사 창건배경이 정확히 밝혀질 수 있었다. 또 미륵사지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 1991호로 지정됐다. 최근 이 사리장엄구는 국보로 승격을 앞두고 있다.
지금의 미륵사지에는 ‘미디어아트페스타’라는 축제가 한창 열리고 있다. 페스타의 콘셉트는 태평성대를 바라는 무왕의 마음이다. 이 땅에는 빈터만으로도 그 지극했던 천년의 소망이 관람객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그 위로 미디어아트 페스타의 주요 공연인 ‘탑의 나라, 소망을 쌓다’가 펼쳐진다. 두 석탑의 사이에 채워졌던 그 소망을 희망이 절실한 지금의 우리에게 빛의 판타지로 빚어 선물하는 빛의 향연이다.
작품은 미륵사의 창건 설화와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구성했다. 설명을 보태기보다는 상징적 표현에 의한 역사 인식과 예술적 몰입으로 감동을 유도한다. 영상은 고요한 새벽, 어둠 속에서 무언인가를 간절히 기원하는 합장의 손부터 시작한다. 이어 다시 소망의 기도를 올리는 어린아이의 작은 손으로 이어진다. 마치 허무함과 고요함을 간직한 1500년 전 백제 유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희망하는지를 함께 생각하고 느끼고 나누길 바라는 듯하다.
이 작품을 연출·감독한 하준수 작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소망의 순간들이 축제에 모인 관객의 삶과 연결돼 있음을 상징한다”면서 “2009년 발굴된 사리장엄구의 기록을 통해 미륵사 창건과 이를 통한 태평성대의 도래를 초현실적인 빛으로 표현해 역사·예술·환상이 어우러지는 축제로 관객과 함께 미륵사지를 채웠다”고 의도를 설명했다.
미륵사지 주변으로도 다양한 미디어파사드가 펼쳐진다. 미륵사지 입구에는 ‘내가 만드는 익산’을 주제로 하는 재미와 환경을 생각한 친환경 그린 페스티벌이 열린다. 심벌마크의 전체적인 모습은 위대한 백제문화유산인 미륵사지 석탑과 익산의 한자표기 첫 글자인 ‘더할 익’(益)의 모양을 모티브로 했다. 찬란한 문화와 역사도시 익산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바로 옆에는 ‘빛의 트리, 회복 탄력성-숲’을 주제로 한 권치규 작가의 작품도 있다. 빛나는 거대한 나무가 빛으로 형상화된 이 작품은 자연이 가진 곡선과 유기적 모습을 살려 자연과 숲을 조각으로 표현했다. 전쟁에 시달리는 중생들을 위해 만든 미륵사 사리장엄구에는 인동초와 넝쿨무늬를 새기고, 뚜껑에는 연꽃잎 무늬를 새겼다. 예술이 가진 힘을 통해 개인의 염원을 넘어 온 인류가 염원하는 희망과 치유, 그리고 회복의 힘을 보여주겠다는 작가의 소망을 담았다. 권치규 작가는 “숲은 겨울의 혹독한 추위 속에서 죽음과 소멸의 시간을 거치고, 찬란한 봄을 다시 맞이하며 강한 재생력으로 극복한다”면서 “자연의 일부인 인간에게도 내재된 회복력이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그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 그리고 큐브로 갇힌 공간에서도 ‘힐링’이라는 명사를 납득시킬 수 있는 공간인 ‘숲’을 주제로 그만의 정체성을 심화시켰다.
미륵사지 입구 소나무에는 ‘I·Story·U’라는 작품도 있다. 태양광으로 쓰는 소망의 편지, 친환경 태양광 조명이다. 유리병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자신만의 소원을 적은 종이가 들어 있다. 1400년 전 백제인들도 미륵사지 탑 안에 자신의 소원을 담은 ‘금제사리장엄봉안기’를 넣어두었다. 낮의 태양이 밤을 밝혀주는, 자연의 불빛을 완성해간다는 의미다.
서연지에는 형형색색 아름답게 빛나는 물방울 빛조형물인 ‘물방울 정원’이 있다. 물방울 조형물에 손이 닿으면 빛이 변하는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다. 미륵사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의 배경에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물고기 알을 촘촘히 그려 넣었는데, 그것을 물방울로 형상화했다. 관람객들은 이 작품들을 보면서 각자 염원했던 희망의 메세지를 얻어간다. 아마도 무왕이 백성들에게 심어주려했던 기대와 희망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