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아버지께 접근한 60대女, 40억 재산을 가로챘습니다[그해 오늘]
by한광범 기자
2023.03.15 00:01:00
"내가 대통령 친구" 판단력 흐려진 피해자에 의도적 접근
자녀 접근 막으려 이간질 …수시로 이사·휴대전화 번호 변경
재산 가로챈 후 원룸 감금…처벌에도 피해회복 사실상 요원
[이데일리 한광범 기자] 80대 남성 A씨는 미국 유명 대학을 졸업한 수재였다. 의사이자 국내 의료·정보기술(IT) 분야 사업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유복하게 자란 A씨는 미국에서 연구소를 다니던 중 귀국해 부친의 발명품의 제품화에 성공해 국내에서 큰 돈을 벌었다. 2013년초 기준 재산만 90억원에 달했다.
A씨는 2004년 형제들 일부로부터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더 나눠달라”는 내용의 유류분 반환소송을 당했고, 6년이 넘는 소송 끝에 대법원에서 2010년 결국 일부 패소 확정 판결을 받았다. 승소한 형제들이 A씨 재산 일부에 대해 강제집행을 하는 등 A씨는 계속된 재산 분쟁으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아내를 떠나보낸 후, 세 자녀와 떨어져 홀로 거주하던 A씨는 2013년초 뇌수술을 받았다. 이즈음 A씨는 치매증상으로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재산 분쟁에 따른 강박으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심했던 A씨는 2013년 8월무렵 지인으로부터 한 단체의 목사 B씨를 소개받았다. B씨 소속 단체는 종교단체를 빙자한 사기단체였다. B씨는 A씨에게 같은 단체 소속의 60대 여성 이모씨를 ‘브로커’, ‘해결사’로 소개했다.
하지만 이씨의 실체는 사기꾼이었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치매 노인에게 접근해 재산을 가로채는 범행을 저질러 처벌을 받았던 전과자였다. 이씨는 내연남 C씨와 함께 판단력이 이미 흐려진 A씨를 속여 재산을 가로채기로 마음 먹었다.
이씨는 A씨에게 자신을 한의자이자 목사로 소개하며 “내가 대통령 친구다. 패소한 재산분쟁 관련 대법원 판결을 뒤집어주겠다. 여생을 잘 보살펴 드리겠다”고 설득했다. 판단력이 흐려진 A씨는 이씨의 말에 점차 세뇌됐다. 이씨 일당은 우선 A씨의 소송을 오랫동안 담당했던 변호사를 해임시켰다.
자녀들이 A씨에게 “이씨가 이상하다. 믿지 마시라”고 했지만, 이미 판단력이 흐려진 A씨를 설득하긴 어려웠다. 이씨는 오히려 A씨에게 세 자녀들에 대해 “재산을 그대로 두면 자식들에게 재산을 다 빼앗긴다. 나에게 맡겨라”고 거짓 험담을 하며 연락을 끊도록 했다.
그리고 이씨 일당은 본격적으로 A씨 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들은 2013년 10월 치매 증상으로 정상적 판단이 어려워진 A씨를 속여 서울 도심의 부동산 등을 이씨에게 넘기는 내용의 양도증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아울러 자필로 유언장도 작성하게 했다. ‘모든 재산을 반평생 돌봐준 이씨에게 양도한다. 자식이나 형제를 포함해 어느 누구도 이에 이유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이씨 일당은 곧바로 A씨의 미국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A씨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 펀드 등을 현금화해 귀국했다.
귀국한 이씨는 A씨 소유 재산을 편취하기 시작했다. 2013년 11월 부동산 매각을 통해 2억4000만원을 가로챈 것을 시작으로 2014년 9월까지 총 40억원의 재산을 가로챘다. 이씨 일당은 A씨가 자녀들과 접촉을 하지 못하도록 자주 주거지를 옮겼고 휴대전화도 변경했다. 그 사이 재산을 더 편하게 가로채기 위해 2014년 1월엔 A씨와 혼인신고를 하기도 했다.
재산을 가로챈 이씨는 2014년 8월 A씨와 이혼 절차를 밟았다. 문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 A씨가 자신을 상대로 이혼조정신청을 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혼조정신청의 조건은 A씨가 이씨에게 재산분할로 11억원, 위자료로 1억원을 지급하는 내용이었다. A씨의 대리인으로 선임된 변호사 역시 사실상 이씨가 선임한 것이었다. 이혼 소송은 2014년 10월 성립됐다.
이씨 일당은 A씨의 현금화 가능한 모든 재산을 가로챈 이후 A씨를 조그만 원룸에 홀로 방치했다. 치매 증상이 심각해진 A씨는 홀로 원룸을 나왔다가 길을 잃어 헤매다가 경찰에 발견되기도 했다. 제대로 된 음식도 제공받지 못한 A씨는 배가 고파 무작정 한 성당을 찾았다가 발견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씨 일당은 오히려 A씨를 협박했다. 이들은 “치매환자는 밖에 나가면 경찰이 잡아간다”고 협박한 후, A씨를 사실상 감금했다. 누구와도 연락할 수 없도록 휴대전화까지 빼앗았다.
A씨는 2014년 10월 중순 원룸 관리인에게 도움을 청했고, 관리인이 경찰에 신고한 덕분에 마침내 자녀와 연락이 닿을 수 있었다. 자녀는 앙상해진 A씨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A씨는 치매 증상이 매우 심각해졌고, 건강상태도 나빠진 상황이었다. A씨 자녀들은 이씨의 범행을 뒤늦게 알고 경찰에 신고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자녀들은 이와 별도로 A씨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건강상태와 함께 급성 치매와 망상장애가 매우 심각한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자녀들은 2015년 A씨에 대해 성년후견개시심판청구를 했고, 심리가 진행 중이던 2016년 2월 말 A씨는 병원 입원 중 사망했다.
경찰은 A씨 사망 이후인 3월 초 이씨를 체포해 구속했다. 검찰은 이씨에 대해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사기, 공전자기록 등 불실기재, 불실기재 공전자기록 등 행사, 범죄수익은닉 등의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이씨는 수사단계에서도 범행을 부인하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내연남의 처벌을 막기 위해 법정에서 위증을 하기도 했다. 기소 후엔 범행을 인정했지만 A씨 자녀들에게 “A씨로부터 취득한 부동산을 이전하기 위해 소유권이전등기를 준비 중”이라는 내용증명을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해당 부동산은 이미 강제경매가 진행되거나 근저당권 설정 등으로 실제가치가 2억원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유족을 또다시 기망한 것이다.
1심은 “범행의 방법, 수단과 결과, 편취액에 비춰 죄질이 매우 좋지 않고 피해가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며 “동종 범죄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있는 만큼 죄책에 상응하는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며 사기에 대해 징역 6년, 범죄수익은닉 혐의에 대해 징역 8월, 위증 혐의에 대해 벌금 500만원을 각 선고했다.
이씨는 “형이 너무 과중하다”며 항소했지만 사건을 병합 심리한 2심은 “치매로 인해 사고력이나 판단력이 결여된 상태란 것을 알고 환심을 사 40억원의 재산을 편취했고, 허위의 혼인신고까지 했다”며 “유족들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고 있는 점 등을 고려해야 한다”며 징역 7년을 선고했다. 이씨는 판결에 불복해 상고했다가 취소해 형은 2017년 3월 그대로 확정됐다.
자녀들은 형사고소와 별개로 서울가정법원에 “아버지와 이씨의 혼인을 무효로 해달라”는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가정법원은 2017년 2월 “A씨와 이씨의 2014년 1월 혼인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이와 함께 2014년 10월 이혼조정도 무효라고 결론 냈다.
아울러 A씨 자녀들은 이씨를 상대로 가로챈 재산 40억원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해 승소했다. 수중에 재산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던 이씨가 소송에 대응하지 않아 A씨 자녀들은 승소했다. 하지만 실제 배상은 끝내 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