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우 한마리가 3억원…평범해서 비범하더라[정하윤의 아트차이나]<2>

by오현주 기자
2022.10.14 00:01:00

▲미술의 법칙 깬 '중국의 피카소' 치바이스
'인민예술가'로 대접받은 중국의 국민화가
가난한 농민집안 출신 그림교육 엄두 못내
정형화된 화법 벗어나 유연함 생동감 넘쳐
정치혼란기, 문인화 타도대상서 비켜난 뒤
중국화가 나아갈 '새 지향'으로 여겨지기도

치바이스의 ‘새우’(1941). 세상을 뜨기 3개월 전까지도 붓을 놓지 않았다는 치바이스가 남긴 작품 수는 수만점. 그중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새우그림’ 연작이 단연 돋보인다. 8마리 새우가 바로 튀어나올 듯 뒤엉켜 있는 작품은 그중 한 점. 치바이스의 새우를 특별하게 만든 요소는 생생한 현장감에 있다. 몸을 덮은 갑각은 물론이고 긴 수염, 집게발, 촉수 등 하나하나를 움직이는 실체로 완성한 새우의 생생한 디테일은 “아무나 도달할 수 없는 경지”란 극찬을 받는다. 종이에 수묵, 101.5×34.5㎝.




[정하윤 미술평론가] ‘중국의 피카소’라 불리는 화가가 있다. 청나라 말인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격변하는 중국을 살다간 치바이스(齊白石·1864∼1957)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는 치바이스 기념관이 있고, 고향인 후난성 샹탄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원 안에 동상이 우뚝 서 있다. 14억명 중국인 중에는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은 치바이스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외국에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미국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나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 같은 유수의 미술관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전시해 왔으며, 크리스티나 소더비 같은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에서도 각광을 받는다. 2017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한 미술품 경매에서는 그의 산수화 ‘산수 12조병’이 8억 1000만위안(당시 약 1500억원)에 낙찰되며 중국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를 경신하기도 했다. 세계 미술시장에서 거액에 거래되는 파블로 피카소나 앤디 워홀에 비견되는 가격대다. 이 낙찰로 ‘중국의 앤디 워홀’이란 별명이 하나 더 생겼다.

한국 관람객에도 친숙하다. 2017년(‘치바이스: 목장에서 거장까지’ 전)과 2018년(‘같고도 다른: 치바이스와의 대화’ 전),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두 차례에 걸친 대형전시를 통해 치바이스의 작품을 대거 선보였다. 당시 중국 국보급으로 들인 전시작의 보험가액만 1500억원쯤 된다는 얘기가 화제가 되기도 했다. 타계 한 해 전인 1956년에는 세계평화평의회로부터 세계평화상을 받은 적도 있다.

도대체 무슨 그림을 그렸기에 국내외에서 이토록 극진한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얼마나 특별한 작품을 그렸기에. 치바이스의 대표작은 단연 ‘새우그림’이다. 새우라니. 어째 김이 빠진다. 희귀종이라도 되나. 아니다. 개천에나 사는 보통 새우다. 금이라도 발라 놨나. 역시 아니다. 일반 종이에 먹으로 그린 그림이다. 아니 이게 정말, 작품가로 따져보면 그림 속 새우 한 마리가 2억∼3억원쯤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만큼 특별한 그림인가. 대체 왜?

모순적이게도 치바이스의 새우는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은 소재다. 치바이스는 ‘중국화’라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저 세상의 무릉도원이나 선비의 절개·지조·기상 등의 온갖 상징을 담았다는 매란국죽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실개천에 펄떡이는 새우와 개구리, 마당에서 종종대는 병아리, 삶의 냄새가 진하게 밴 농기구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았다. 고고한 문인이라면 쳐다보지 않았을 평범한 소재, 그것을 그렸다는 점이 바로 특별한 점이다. 굳이 치바이스를 워홀에 비해야 한다면, 그것은 단지 작품값 때문이 아니라, 코카콜라병이나 농기구 같은 일상의 소재를 예술의 영역으로 가져왔기 때문이어야 한다.

치바이스가 사용하는 필법도 별것 없다. 그래서 파격적이다. 중국화는 그 유구한 역사만큼 따라야 하는 법칙이 많다. 점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붙는 준법의 종류도 많고, 선을 어떻게 휘두르는지에 따라 화파도 나뉜다. 치바이스는? 그중 어떤 법칙도 따르지 않았다. 나름의 방식으로 먹의 농담을 조절해 붓을 놀렸을 뿐이다. 그렇게 그린 그의 새우는 부드럽고 유연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그래서 치바이스의 새우는 종이 위에 놓인 것이 아니라, 물 안에서 유영하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그림 옆 글귀도 허를 찌른다. 그림에 덧댄 글은 자고로 그림에 대한 감상이나 그림의 의미를 현학적으로 표현하기 마련인데, “이 종이는 먹이 스미지 않아서 맘껏 붓질을 할 수 없다”처럼 일기장에나 끼적거릴 법한 말을 써 놨다. 치바이스를 중국의 피카소에 비유해야 한다면, 이 또한 단순히 작품값 때문이 아니라, 미술의 법칙에 파격을 가져왔다는 점 때문이어야 한다.

치바이스의 ‘연꽃 호수’(1924). 붓이 스치기만 하면 만물은 순식간에 튀어나올 듯 꿈틀대는 생물체가 된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생명력’과 ‘현장감’은 치바이스의 작품을 관통하는 특징. 문인화가 대부분이 매란국죽에 매달리고 고고한 산수에 빠져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종이에 수묵채색, 182×96㎝.




치바이스가 나고 자란 환경 역시 지극히 평범하다. 그는 중국 후난성의 시골마을, 가난한 농민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대단한 그림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17세기부터 전해 내려오던 미술교본인 ‘개자원화보’(芥子園畵譜·중국 청나라 초에 간행한 화보. 제1집은 1679년, 제2·3집은 1701년, 제4집은 1818년에 펴냈다. 산수·난죽매국·화훼·영모·인물 따위를 체계적으로 편집했다)를 보며 산과 나무, 꽃과 풀을 그리는 것을 연습하고, 목수일을 배우며 글자나 문양을 나무에 새기는 기술을 터득했을 뿐이다. 탄탄한 미술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약점이기도 했지만, 어떤 정통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개성 있는 화풍을 만들 수 있는 강점이기도 했다.

물론 생경한 그림 스타일과 비천한 출신이란 이유로 치바이스는 주류 미술계에서 쉬이 인정받지 못했다. 50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골 출신에 배우지도 못한 자가 그린 ‘듣도 보도 못한 그림’이란 취급을 받았다. 전환을 맞은 것은 1922년 일본에서 열린 ‘중일회화연합전’에서 큰 호평을 받으면서였다. 일본 사람들이 열광하고, 작품이 완판 되자 중국인의 인식도 달라졌다. 나라 밖에서 먼저 인정을 받은 케이스다.

이후로 치바이스의 명성은 하늘 높이 올라갔지만, 그는 일관되게 자기 그림을 그렸다. 예를 들면 ‘귓밥’(1947)과 같은 작품. 그림 안에는 콧수염 턱수염이 덥수룩한 사내가 식탁 앞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다. 생선을 먹던 젓가락으로 귀를 후볐나 보다. 젓가락에 들린 것이 생선살인지 귓밥인지 헷갈린다. 교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이 그림을 보자니 웃음이 난다. 정신의 세계, 마음의 풍광을 다루던 이전 중국화에서는 느낄 수 없던 정겨움이다. 이처럼 치바이스의 그림은 저 멀리 난해한 별나라에 있지 않다. 생선을 먹으며 귓밥을 파는 우리의 일상에 착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치바이스의 ‘귓밥’(1947). 어수룩한 사내의 일상을 그린 작품은 치바이스가 추구한 ‘인물화’의 지향을 그대로 내보인다. 초상이라 하면 으레 떠올릴 경직된 얼굴과 포즈가 없는 데다가 복잡한 배경은 지우고 본질만 끌어내는 ‘생략’의 힘까지 얹어, 군더더기 없이 시대를 앞선 ‘현실주의적’ 인물화의 완성을 봤다. 종이에 수묵채색, 102×34㎝.


1957년, 치바이스는 93세로 영면했다. 돌아가신 분을 두고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사망 시기는 참으로 적절했다. 이후의 중국 정세가 너무도 어렵게 흘러갔기 때문이다. 그가 사망한 해인 1957년에 시작한 반우파투쟁부터 문화대혁명(1966~1976)까지, 중국은 정치적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때문에 미술가들은 매일 살얼음판을 걸었다. 하루아침에 그림의 형식이나 소재, 출신성분에서 꼬투리가 잡혀 우파로 낙인찍히기도 하고, 그로 인해 치욕스러운 일을 당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으니 말이다. 험한 꼴을 당할까 무서워서 자신의 작품을 손수 불태우는 이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특히 치바이스가 그리던 중국화는 과거 봉건체제의 잔재란 이유로 ‘개조’냐 ‘폐기’냐의 기로에 섰던 장르였다. 먹이 너무 진해서, 산수화를 그려서, 또 다른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강도 높은 비난을 받아야 했던 미술가가 너무 많았다.

다행히 치바이스의 명예는 안전히 보존됐다. 생전 워낙 정치와는 철저히 거리를 두기도 했지만, 그의 평범한 배경과 일상적인 소재, 비전통적인 방식에서 타도 대상이던 문인화의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민 출신으로 주변의 물건을 나름의 방법으로 그린 그림은 그래서 안전했고, 오히려 중국화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지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평범했기에 비범한 화가로 빛나게 됐다고나 할까.

혹 살다가 특출나지 않은 배경이나 능력, 외모 등으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면 치바이스의 새우를 떠올려 봐도 좋겠다. ‘평범함이 비범함이 아니던가!’라고 되뇌면서.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