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자꾸 몸을 낮춘다…명작 자리 채운 '아시아 예술'

by오현주 기자
2022.08.31 00:01:01

리움미술관 기획전 ''구름산책자''
켄고 쿠마의 84m 패브릭 조각설치 ''숨''
日전통 종이접기 접목, 환경문제 접근
지구온난화 방책낸 베트남 대나무집도
개관이래 첫 아시아 테마로 꾸린 45점
''아시아예술'' 새 가능성과 역동성 찾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기획전 ‘구름산책자’ 전경. ‘아시아예술’을 다루는 기획전에 내건 작품 중 한국작가 연진영의 ‘패딩기둥’(2022)이다. 패딩점퍼 300벌을 뭉치고 엮고 감고 꼬아 높이 6m, 지름 2.88m의 거대한 기둥을 세웠다. 건축미학적인 조형물의 역할을 넘어 연간 6000만톤 이상 버려지는 무분별한 옷소비에 대한 자각과 반성까지 끌어내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마디로 ‘변화’였다. 4년 반의 긴 공백을 묻으며 지난해 10월 다시 일어난 리움미술관이 꺼낸 첫마디가 ‘변화’였다는 얘기다. 사실 구구절절 늘어놓은 것도 아니다. 대중에게, 사람에게 좀더 다가서겠다는 행간뿐이었으니. 편한 대로 철벽방어인 듯 겹겹이 둘러친 싸개를 풀어내겠다는 의미려니 읽어냈다. 하지만 반은 의심했고 반은 주저했더랬다. 어차피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고, 그 시간을 드라마틱하게 단축하기엔 리움미술관이 가진 게 너무 많았으니까.

지난 3월 개막해 4개월여간 진행한 올해 첫 기획전에서 조짐은 보였다. 한쪽에는 AI가 주역인 미래 가상세계를 펼쳐 놓고(‘이안 쳉: 세계건설’ 전), 다른 한쪽에선 역사·제도·기술·편견·국적 등이 엉킨 현실의 제약을 극복해보자 했더랬다(‘아트스펙트럼 2022’ 전). 한쪽에선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폭발시킨 애니메이션 영상을 계속 돌려댔고, 다른 한쪽에선 6m 높이 벽화 같은 회화를 배경으로 체력단련장을 통째 들이기도 했다. 3040세대에 걸친 국내외 젊은 작가들이 빚은 이들 작업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말이다. 그 손과 기량, 실험정신 등을 ‘변화’로 삼아 리움미술관이 대신 입으려 했나 싶더란 거다.

다소 번잡하다 할 ‘주변정리’를 이처럼 깔아둔 건, 9월에 다시 시작하는 리움미술관의 기획전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대목이라서다. 가는 길에 한번은 즈려밟아야 할 진달래꽃쯤 되려나.

돈 탄 하가 제작한 ‘물 위의 대나무집’(2022·600×600×535㎝). 지구온난화에 해수면이 급격히 높아지는 메콩강 삼각주 지역주민을 위해 고안한, 물에 뜨는 수상가옥이다. 대나무와 재활용이 되는 플라스틱병, 플라스틱드럼통 등 친환경적 재료를 사용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청동조각 ‘거대한 여인 Ⅲ’(1960)이 삐죽이 섰던 전시장 초입이다. 조지 시걸의 청동조각 ‘러시아워’(1983)가 버티고 섰던 그 길목이기도 하고.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걸작 두 점으로 더 강렬했던, 로비에서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긴 슬로프를 말하는 거다. 지난해 재개관전 ‘인간, 일곱 개의 질문’에서였다.

이들 조각거장의 ‘명작’ 자리를 이제는 아시아작가의 ‘신작’이 대신 채운다. 일본 현대건축을 대표하는 켄고 쿠마(68)의 ‘숨’(SU:M·2022)이다. 주름이 잔뜩 잡힌 패브릭을 배배 꼬아 12m 층고의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았다. 쭉 잡아서 펴면 84m까지 늘어난다는, 일본의 전통 종이접기 방식인 오리가미를 접목한 이 조각설치작품은 환경문제와 맞닿아 있다. 보이는 것 이상의 방대한 표면적으로 “자동차 9만대가 연간 뿜어내는 휘발성유기화합물을 흡수할 수 있다”니까. 사람과 건축, 환경까지 아우른 기능성에다가 변형 가능한 유기적 조형미까지 유감없이 내뿜고 있다.

켄고 쿠마(68)의 ‘숨’(SU:M·2022). 리움미술관 기획전 ‘구름산책자’를 여는 작품이다. 전시장으로 들어서는 슬로프의 천장에 걸렸다. 쭉 잡아 펴면 84m까지 늘어나는 이 조각설치작품은 신소재 오염 흡수천을 필터처럼 접어 연간 자동차 9만대 배기가스 오염물질을 흡수할 수 있다고 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하지만 이는 시작일 뿐이다. ‘아시아예술’에 집중한 기획전 ‘구름산책자’는 이미 현대건축의 거장 반열에 오른 쿠마의 명성에 더는 기대진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 우리시대에서 보고 말하는 아시아작가의 아시아작품을 다룬 ‘아시아예술’은 리움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 기획한 테마다. 건축과 디자인, 음악과 문학까지 섭렵한 예술가 24명(팀)의 45점을 걸고 세우고 펼쳤다.

굳이 ‘아시아’인 건 “미술이 세상에 던지는 ‘새로운’ 가능성과 역동성을 찾아내고 싶어서”란다.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위치, 세계질서에 짓눌려온 역사 등에 늘 시달려온 아시아의 한계를 예술로 한번 깨보겠다는 뜻이다. ‘구름산책자’에 든 의미도 단순치 않다. 기후요소인 ‘구름’이란 본뜻에다가 흔히 클라우드(Cloud·구름)라고 불리는 뜬구름에 많은 걸 쏟아붓는 현대인의 하이퍼링크적 감각까지 자극했다고 할까. 한마디로 오늘과 내일, 현재와 미래를 두루 오가는 현상을 다채로운 작품들로 구현한 거다.



리움미술관 기획전 ‘구름산책자’ 전경. 앞쪽으로 A.A.무라카미가 제작한 ‘C-타입하우스’(2022·212×288×212㎝)가 보인다. 1960년대 태동한 일본 건축운동인 메타볼리즘을 참조해 ‘미래형 셀-하우스’로 세웠다. 안쪽에 보이는 투명한 돔 안에선 전시기간 내내 키우는 버섯이 들어 있다. 폐허가 된 세계에서도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인류를 구원할 대체재료란 의미를 들였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만큼 전시는 쉽게 예견하거나 단칼에 재단할 수 없다. 자극받는 만큼 보인단 얘기다. 일례로 한국작가 연진영(29)이 세운 ‘패딩기둥’(2022) 앞에선 잠시 할 말을 잊는 게 정상이다. 작가는 패딩점퍼 300벌을 뭉치고 엮고 감고 꼬아 높이 6m, 지름 2.88m의 거대한 기둥을 세웠는데. “막대한 양의 재고의류를 직접 눈앞에서 보게 하는” 놀라운 경험을 제공하는 이 작품으로 연간 6000만톤 이상 버려지는 무분별한 옷소비에 대한 자각과 반성까지 촉구한다니 말이다.

베트남식 문제제기도 있다. 전시장 한쪽에 탄탄하게 지어 세운 오면체 대나무 덩어리. 돈 탄 하(43)의 ‘물 위의 대나무집’(2022)이다. 지구온난화에 해수면이 급격히 높아지는 메콩강 삼각주 지역주민을 위해 고안했다는, 일종의 모델하우스다. 과연 어떻게? 물에 뜨는 수상가옥으로. 대나무로 뼈대를 잡고, 지붕과 벽은 재활용이 되는 플라스틱병으로, 바닥은 플라스틱드럼통에 고정하도록 했다.

돈 탄 하의 ‘물 위의 대나무집’(2022) 내부. 안쪽 벽면에 걸린 모니터에는 루앙(38)의 영상작품 ‘도쿠-헬로우 월드’(1922·싱글채널비디오 3분25초)가 돌아가고 있다. 리움미술관 ‘구름산책자’ 전이 시도한, 성향·작업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조인해 마치 하나처럼 꾸려낸 전시작들 중 하나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그렇다고 45점 모두가 해결해야 할 숙제를 끌어안고 있는 건 아니다. 로렌스 렉(40)은 현실과 가상을 뒤엉켜낸 ‘네펜테 존’(2022)이란 영상설치작품을 꺼내놨다. 지금부터 1000년이 지난 먼 미래에 유적지로 발견된 리움미술관을 미지의 장소로 찾아가는 시나리오다. 삼손 영(43)은 세상에는 없는 악기가 만든 사운드를 눈앞에 데려다놨는데. ‘가능한 음악 #2’(2019)는 “상상이나 디지털로만 존재할 이상한 악기, 그 악기가 만들어낸 변칙적인 사운드”가 거대한 소라스피커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장면을 만들어낸다.

삼손 영이 꾸려낸 ‘가능한 음악 #2’(2019). 특별하고 이상한 악기, 그 악기가 만들어낸 변칙적·간헐적 사운드가 마치 한쪽 바닥에 묻어둔 거대한 소라스피커에서 빠져나오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실제로 16개의 스피커가 뽑아내는 ‘가능한 음악’을 들을 수 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전시에서 특별한 건 성향·작업이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조인해 마치 하나처럼 꾸려낸 ‘연출’이다. 2명 이상의 ‘연합작품’도 여럿인데, 그중 아지아오(38)가 벽과 바닥에 박은 돌기로 압축한 정원(‘카레산스이’ 2014), A.A.무라카미가 고안한 기계가 뿜어내는 안개고리(‘영원의 집 문턱에서’ 2021∼2022), 트로마라마가 인도네시아 칼리만탄 지형을 딴 그래픽 풍경(‘솔라리스’ 2020)이 뭉친 작품은 거대한 블랙박스의 어둠을 통째 벗겨낸다.

리움미술관 기획전 ‘구름산책자’ 전경. 세 작가의 세 작품을 한 공간에 들여 하나의 거대한 설치작품을 보는 듯하다. 왼쪽부터 A.A.무라카미의 안개고리를 내뿜는 기계 ‘영원의 집 문턱에서’(2021∼2022), 트로마라마의 그래픽 풍경 ‘솔라리스’(2020), 아지아오의 돌기정원 ‘카레산스이’(2014)(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굳이 이전에 봐왔던 ‘리움다움’이 필요하다면 압도적 규모에서 찾을 수 있다. 공간에 구애받지 않는 대작을 시원하게 꺼내놓는 디스플레이는 대단한 강점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갸우뚱할 수도 있겠다. 명품과 걸작으로 구획했던 그 너머의 미래를 내다보겠다는 리움미술관의 의도가 보일 수도, 안 보일 수도 있을 테니.

그 간격을 어떻게 더 좁혀나갈지는, 몸을 점점 낮추고 있는 ‘새로운 리움’이 해결할 테지만, 이제 공은 미술관을 찾는 이들에게 넘어온 듯하다. ‘변화’란 게 관람객 다니는 길에 까는 레드카펫이 전부가 아닐 테니, 그 위에 놓인 ‘진짜’를 찾아내는 일 말이다. 전시는 9월 2일 개막해 내년 1월 8일까지 이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