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여행①] 길에서 가을을 만나다
by강경록 기자
2018.09.24 00:00:01
한국관광공사 10월 추천 가볼만한 곳
지리산둘레길 가을 여행
[이데일리 강경록 기자] 길에서 가을을 만난다. 타박타박 걷기 좋은 계절, 길 따라 가을의 노래가 펼쳐지는 지리산둘레길로 가보자. 3개 도(전북, 전남, 경남)와 5개 시·군(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을 연결하며, 21개 읍·면과 120여 개 마을을 잇는 장장 295km 걷기 길이다. 그중 인월-금계 구간은 보석처럼 빛나는 비경을 품었다. 저녁노을보다 붉게 익은 고추, 초원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 다랑논에서 황금빛으로 춤추는 벼, 건넛마을로 향하는 촌로의 느린 걸음이 마음을 달랜다. 용광로보다 뜨거운 여름을 온몸으로 견뎌낸 농작물은 흙을 떠날 채비를 마쳤다. 수확의 계절, 지리산둘레길의 가을은 도리어 푸르디푸르다.
| 하늘재에서 창원마을로 향하는 구간. 자동차로 달렸다면 몰랐을 모든 자연의 이야기가 두 발로 걸으니 귓속으로 파고든다.(사진=사단법인 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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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둘레길 걷기가 처음이라면 인월센터에서 시작하길 추천한다. 센터는 인월장터로에서 구인월교를 건너기 전, 왼쪽으로 200m 가면 나온다. 센터에는 구간 지도와 숙박 정보, 주변 관광지 안내 리플릿 등이 있다. 때론 함께 채비 중인 길동무도 만난다. 길의 상태, 기상 상황 등을 센터에서 확인하고 나서자(월요일은 휴관이니 참고할 것).
출발 전 인월전통시장에 들러 뜨끈한 순댓국으로 배를 채워도 좋겠다. 여행 일정이 맞으면 끝자리 3·8일에 서는 오일장 구경도 재밌다. 제철 산나물과 약초를 파는 할머니와 인사 나눈다. 장거리 트레킹을 앞두고 가방에 나물 가득 담고 싶은 맘을 꾹꾹 참는다. 4~10월 토요일에는 풍물 시장, 할머니 장터, 음악 공연 등이 펼쳐지는 인월토요장터가 열려 볼거리가 많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리산둘레길 탐방에 나서보자. 구인월교를 건너 좌회전하면 인월-금계 구간(20.5km) 여정이 시작된다. 1시간에 대략 2.5km 이동하니 총 8시간 코스다. 점심나절에 첫발을 뗐다면 중간 지점에서 하루 머물고, 다음 날 금계까지 남은 구간을 걸으면 무리가 없다. 해가 짧아지는 시기이므로 늦어도 오후 1시에는 출발할 것을 권한다.
한가로이 풀을 뜯는 소를 바라보며 타박타박 걷다 보면 중군마을을 만난다. 고려 시대에 오군(전·중·후·좌·우군) 가운데 중군이 이 마을에 주둔해서 붙은 이름이다. 벽화를 따라 천천히 오르막을 걸으면 황매암갈림길이 나온다. 어느 길로 가도 수성대에서 합쳐지는데, 황매암으로 향하는 길은 산그늘이 있어 시원한 대신 조금 가파르다.
인월-금계 구간은 옛 고갯길 등구재를 중심으로 지리산 주 능선을 조망하며 걷는다. 6개 산촌이 정겹고, 둑길과 임도, 농로, 숲길, 산길, 차도 등 모든 길을 만난다. 걷다 보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순간에도 불안감이 찾아든다. 첩첩산중에 홀로 걸으면 괜한 두려움에 걸음이 빨라진다. 그때쯤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이 나풀댄다.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 때론 생명의 신호다. 갈림길마다 방향을 표시한 나무가 산과 나를 지켜주는 장승 같다. 빨간색은 인월-금계 구간 끄트머리인 금계로 향하는 길이요, 검은색은 시작점인 인월로 가는 방향이다.
지리산둘레길은 500m마다 이정표가 있다. 길을 잃었다면 지나온 길을 되돌아가서 놓친 이정표를 확인하는 편이 낫다. 곳곳에 쉼터와 약수터, 요깃거리를 판매하는 식당이 있으니 배고플 걱정은 없다.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은 지친 발에 최고 명약이 아닐까. 이정표마다 더해지고 덜어지는 숫자가 걸어온 길의 거리를 말해준다.
| 구인월교 인근에 위치한 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 둘레길 관련한 모든 정보를 구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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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월에서 5.8km, 출발한 지 2시간이 흘러 배너미재를 넘는다. 침엽수림 사이로 달걀버섯이 얼굴을 내민다. 달걀버섯은 독버섯인 개나리광대버섯과 유사하여 착각하기 쉬우므로 잘 구분해야한다. 달걀버섯은 로마 시대에 네로 황제가 황금과 바꿔 먹었단다. 천천히 숲길을 빠져나오니 장항마을이다. 수령이 410년이나 되는 당산나무가 마을을 지킨다. 장항교를 지나 매동마을을 거쳐 하루 일정을 마친다.
인근의 실상사도 볼 만하다. 실상사는 보통 첩첩산중에 들어앉은 사찰과 달리 산내면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걷다가 들러도 부담 없다. 단일 사찰 중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데다, 실상사에서 바라보는 지리산 천왕봉의 웅장한 풍경이 감탄을 자아낸다.
실상사에서 상황마을로 가는 길목, 산내면은 두 번째 고향에 터를 잡은 사람이 많다. 지리산과 땅의 부름을 받아 귀농한 이들이다. 사연 많은 젊은 날을 보내고, 이곳에서 자연의 속살을 누린다. 세척된 채소를 문 앞에서 받는 편리함 대신, 가축 분뇨 섞인 흙에서 살아 있는 먹거리를 마련하려고 밤낮으로 몸을 쓴다. 흙과 바람, 자연에 순응하며 수확한 모든 것은 건강함 이상의 정신적 산물이다. 하룻밤 묵어가는 객은 귀농한 용기와 부러움에 박수를 보내지만, 겪어본 이들은 감내해야 할 무게가 적지 않음을 안다.
| 같은 줄기에서도 다르게 익어가는 농작물처럼, 둘레길 풍경에서 제각기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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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에서 맞는 아침은 황홀하다. 일정이 되면 무리하지 않고 하루를 머무는 이유다. 차가운 공기가 귓바퀴를 감돌아 마음으로 파고들다 나간다. 정화다. 동틀 무렵 능선을 차고 오르는 태양 앞에 마음은 지리산에 터를 잡았다. 가을볕에 익은 벼는 고개 숙이고 땅을 바라본다. 땅과 이별을 고하고 누군가의 손에서 입으로, 다시 흙으로 돌아올 채비를 하는 듯 보인다.
길을 나서는데, 상황마을 민박에서 기르는 개 ‘바래’가 앞장선다. 간혹 민박한 손님과 금계까지 함께 걷고 돌아온단다. 오르막길을 포함해 7.5km나 되는 거리를 함께 걸었다. 발걸음이 느려지면 멈춰서 기다려준다. 정자에 올라 물도, 바람도 나눠 마셨다. 혹여 걷다가 바래를 만나면 인사를 건네시라. 언제고 당신의 든든한 안내자를 자처할 터이니. 상황마을은 다랑논이 폭포처럼 흐른다. 다랑논은 산골짜기 비탈진 곳에 층층으로 일군 논이다. 자동차로 오르면 순식간에 지나쳤을 풍경이 온몸으로 와락 안긴다.
숨이 가빠진다. 상황마을에서 제법 오르막길을 오르면 등구재다. 고개를 사이에 두고 행정구역이 바뀌는 지점이다. 왼발은 전북 남원시 산내면에, 오른발은 경남 함양군 마천면에 있다. 옛사람들은 함양에서 오도재, 등구재를 넘어 남원으로 왕래했단다. 이내 창원마을 전경이 펼쳐진다. 지리산둘레길은 왼쪽, 창원마을로 향하는 빠른 길은 오른쪽이다. 왼쪽으로 돌아가라는 안내판 때문에 둘러 가는 느낌이지만, 둘레길은 왼쪽이 맞다. 오른쪽 길은 사유지이므로 빨리 가고픈 맘 다잡고, 몸을 왼쪽으로 틀자. 이내 다다른 창원마을은 곳간이 많던 곳이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 일광욕하는 고추가 보인다. 가을이 마당에 펼쳐지니 넉넉한 수확의 계절을 실감한다.
금계마을을 마지막으로 인월-금계 구간의 목적지에 다다랐다. 20km 남짓 걸었는데 마음이 홀가분하다. 지리산둘레길이 열린 지 10년이 흘렀다. 지천으로 난 고사리는 새순을 10번 냈고, 흙길은 더러 시멘트 길로 바뀌었다. 땅거미 지면 겨우 한두 채 불빛이 보일까 말까 하더니, 이제 민박도 여럿 있다. 외지인은 산 중턱에 그림 같은 집을 마련하려고 부지런히 망치질한다. 고요한 산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그저 사람이 지금보다 조금 더디게 다가서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직 걸을 힘이 남았다면 ‘지리산 속 석굴암’ 서암정사로 가자. 지리산제1교에서 농어촌버스를 이용해도 된다. 벽송사에서 서쪽으로 600m쯤 떨어진 곳이다. 서암정사(瑞庵精舍)는 ‘상서로운 바위를 장엄(莊嚴)했다’는 뜻으로, 석굴 법당이 인상적이다. 아기자기한 조경과 함께 지리산의 품에 안겨 불교 석조 작품을 감상하기 좋다.
◆여행코스= 구인월교→중군마을(2.1km)→황매암갈림길(0.8km)→수성대 입구(1.1km)→수성대(0.3km)→배너미재(0.8km)→장항마을(1.1km)→실상사(2.66km)→상황마을(1.9km)→숙박→등구재(1km)→창원마을(3.1km)→금계마을(3.5km)→서암정사
△가는길= 경부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오수IC교차로에서 구례·남원 방면 우회전→춘향로→백공산사거리에서 장수·남원 IC 방면 좌회전→충정로→광주대구고속도로→인월교차로→황산로→신촌교차로에서 지리산국립공원·인월 방면 우회전→지리산둘레길 인월센터
△먹을곳= 칼국수는 인월면의 박서방해물칼국수, 돼지국밥은 인월면에 시장식당, 돼지고기김치찌개는 마천면의 강쇠네흑돼지가 유명하다.
△주변 볼거리= 금대암, 국악의성지, 뱀사골계곡, 남원백두대간생태교육장전시관